경쟁기업 헐뜯고 북한실세 줄잡기/대북교류 과당경쟁 “눈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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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남북경협자금 따내기 속셈/제품포장지에 낙서… 계약파기 초래도
대북 경제교류가 은밀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는만큼 그동안 민간기업들의 대북접촉이 알려진 것보다 지나친 과잉경쟁을 빚어온 것으로 나타났다.
교역을 늘리기 보다는 서로 경쟁기업을 헐뜯거나 깎아내리는 쪽에 더 신경을 쓰는가 하면 북한의 실세와 다투어 접촉하기 위한 줄잡기 경쟁이 벌어져 관련업계에서조차 『소련·동구진출 때처럼 출혈경쟁으로 이어지는게 아니냐』고 우려를 낳고 있다.
지난 2월 A상사는 북한의 4·15물자조달계획(김일성 생일선물)에 따라 3백만달러어치의 반출품을 부산항에서 선적하려다 실패하고 계약을 취소당했다.
검수까지 끝내고 창고에 쌓아둔 제품 포장지마다 경쟁회사 소행으로 보이는 김일성 비방낙서가 매직팬으로 몰래 쓰여져 있어 포장지를 급히 바꾸려했지만 북측이 『당초 약속시간을 지키지 못했다』며 계약을 파기했기 때문이다.
또 B사가 지난 1월 북경에서 북한측과 2백만달러어치의 생필품 반출상담을 할때 이를 눈치챈 C사가 『B사는 모기관이 세운 위장회사』라고 헐뜯고 『더 싼 값으로 동남아에서 조달해주겠다』며 상담을 가로채버렸다.
북한에 물건을 주었다가 돈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늘고 있어 D사의 경우 지난해말 1백만달러어치의 상품을 북한으로 보냈으나 북측 대리인이 『왜 남한이 원산지라는 사실을 속였느냐. 다른 남쪽 거래선으로부터 증거를 건네받았다』며 일방적으로 거래를 끊어버렸다.
D사는 북한측과 수출보험계약도 없고 클레임을 제기할 방법도 찾지못해 돈을 날려버렸다.
올해 초에는 북한이 「수출하는 상품의 남조선으로의 재반입 금지」조항을 앞세워 직거래 계약체결이 안된 국내 종합상사의 아연괴 반입때 화주변경을 요구하는 바람에 갈등을 빚기도 했다.
북한의 실세와 손잡기 경쟁은 더 치열하다.
대우 김우중회장이 김달현 북한부총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E사는 북한의 다른 경제담당 부총리,F사는 또다른 부총리와 손을 잡았고 G사는 북한 실세의 아들과 주로 접촉해 사업을 벌이는 등 국내 주요그룹들 대부분이 그동안 중국 등 제3국에서의 치열한 경합끝에 서로 다른 한가닥씩의 대북채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관계자는 『북한 김일성주석은 12명의 부총리에게 각각 전문분야를 주어 「분할통치」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다른 채널을 통해 대북접촉을 경쟁적으로 부추기는 것 자체가 북한의 전략』이라고 풀이했다.
국내업계의 이같은 과잉경쟁이 단순히 북한과의 교류를 늘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룹 이미지경쟁,나아가 수십억달러 이상일 것으로 기대되는 남북경협자금을 둘러싸고 고지를 선점하려는 속셈이 깔려있어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각 그룹 대북창구인 종합상사들의 경영상태가 나빠지면서 대북 경제교류를 통해 이미지개선과 실적을 올리려는 것도 과열경쟁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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