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용 빅 쇼'에 북핵 밀릴까 우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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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그런 가운데 나온 데니스 와일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담당 선임보좌관과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차관보의 '남북 정상회담 부적절' 발언은 내정간섭이라는 느낌을 줄 정도로 강하다.

미국이 남북 정상회담 추진에 제동을 걸려는 배경은 뭘까. 백악관 사정에 밝은 워싱턴의 한 외교소식통은 "북한에 다가가는 한국 발걸음의 속도를 조절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남북 정상회담 논의가 한국의 대선을 의식한 정략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고 지적했다.

이 소식통은 "청와대와 범여권이 북한 비핵화 실현을 위한 치밀한 전략을 짜기보다 한국의 대선 판도를 흔들기 위해 8.15 광복절에 맞춰 노무현.김정일 회담이란 '빅 쇼'를 선보이는 데 더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 노.김 회담이 이뤄지면 6자회담을 통한 북한 핵문제 해결이란 목표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게 미국의 우려"라고 전했다.

다른 소식통은 "회담이 열리면 그걸 간절히 희망한 한국이 결국 많은 양보를 할 것이고, 그건 자칫 북한 핵문제 해결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말했다.

또 "회담을 하면 북한은 한.미의 틈새를 벌리려 할 테니 미국으로선 회담의 성급한 추진이 달가울 리 없다"고 했다.

미 행정부는 남북 정상회담 실현을 위한 한국 정부의 움직임이 빨라진 것을 포착했다고 한다.

정보 계통의 한 관계자는 "한국이 다양한 경로로 북한에 회담을 타진하고 있다"며 "미국은 이해찬 전 총리 등 친노(親盧) 인사들이 최근 북한을 자주 방문하는 걸 수상하게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사전 공조를 강조하는 건 북한 비핵화의 진전 상황에 맞춰 남북 정상회담 추진과정을 관리해 나가겠다는 의도"라고 설명했다.

◆ "한국, 북한에 일관된 메시지 보내야"=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는 4일 민화협 조찬포럼에서 "한국 정부는 일관된 대북정책을 유지해 북핵 6자회담과 남북 당국 대화가 똑같은 메시지를 북한에 보낼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꼬집은 것이다.

이런 시각을 의식한 듯 정부 당국자들은 남북관계와 북핵 해결의 조율을 강조한다. 백종천 안보실장은 11일 동북아 미래포럼에서 "6자회담과 남북관계가 기계적으로 연결돼 어느 하나가 해결되면 나머지가 뒤따르는 것이 아니다"라며 "양자는 선순환적으로 병행 추진한다는 게 원칙"이라고 했다.

일각에서 제기되는 정상회담에 대해서 정부 고위 당국자는 "가능성은 열려 있으나 지금은 그 시기가 아니다"며 선을 그었다.

6자회담 진전과 비핵화 일정의 순조로운 이행에 따른 후속 일정이 궤도에 오르지 않는 상황에서는 어렵다는 얘기다.

워싱턴=이상일 특파원, 서울=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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