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시험 강박관념|"공부 너무 잘하는 친구 미워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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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우리 자살하자.』『그래.』
『어떻게.』『약 먹고.』『우리가 죽으면 슬퍼하는 애들이 있을까.』
『없겠지. 우리 둘만 슬픈 아이들이니까.』
지난달 30일 기말고사를 끝내고 같은 반 친구인 영수(12·서울B국민학교6)와 철희(12)사이에 오간 쪽지내용. 성적이하위권인 이들은 시험만 끝나면 으레 자살모의를 한다. 그러나 이들의 이러한 행동은 반의 다른 아이들로부터 관심이나 동정을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시험이 끝나면 반 아이들의 대부분이「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의논이 분분한데다 영수등이 죽음의 방법에 도통했다고 믿는 아이들이 오히려 어떻게 죽는 것이 좋으냐고 물어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험이 끝나면 선풍기를 얼굴에 틀어놓고 자면 죽는다거나 약은 약국마다 돌아다니며 조금씩 사야한다는 등 죽는 방법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해요. 시험 못 봤다고 유서를 쓰는 아이들도 있어요.』
우등생인 아현(12)은 자신도 시험을 못 봤을 때 집에 들어가기 싫고, 가슴이 답답해서 유서를 쓰고 죽을까하는 생각을 했다고 말한다.
그냥 집을 나가면 인신매매 범에게 끌려 갈까봐 무서워 죽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시험보기 며칠 전에는 지진·전쟁이 나거나 학교에 불이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또 지난번 시험을 잘못 보았을 때는 엄마가 교통사고라도 났으면 하는 공상을 하다가 너무 무서워서 운 적도 있어요.』
반에서 10등쯤 한다는 석현(11·서울K국민학교5)은 시험 때만 되면 이렇게 나쁜 생각을 많이 해 더 공부를 못하면 전과자나 나쁜 사람이 될까봐 겁난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시험·성적·공부로 인해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있다고 입을 모은다. 이러한 스트레스는 성적이 좋은 아이나 나쁜 아이나 공통적이다.
시험은 보통대부분의 학교에서 한 달에 한번씩 본다. 이 시험결과는 대개 학기말에「매우 잘함·잘함·노력을 요함」등으로 표기된 성적표로 받아보게 되지만 실제로 엄마들이 학교에 수시로 드나들면서 자신들의 성적을 체크하고 있어 안심할 수 없다고 아0l들은 말한다.
또 시험이 모두 단 답형이라 정확한 점수가 나오고 채점도 아이들이 하기 때문에 시험성적이 공개돼 이로 인해 자존심이 상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
『시험을 못 보면 엄마한테 혼나기도 하고 기가 죽어요. 또 공부 못하는 애는 친구나 선생님한테도 무시당해요.』
서영(12·서울B국민학교6 )은 반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는 금방 표시가 난다며 공부 못하는 아이가 뭐라고 한마디하면『넌 이번 시험에서 10개나 틀린 주제에 무슨 말이 많으냐』고 타박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모두 공부를 잘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공부 잘하는 아이가 한마디하면 잘난 척하는 것 같아 미워진다고 말한다.
『출세를 하거나 먹고살기 위해서는 대학을 나와야 하고, 대학에 들어가려면 공부를 잘해야해요. 시험은 누가 공부를 잘하는지 구별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꼭 필요해요.』
아이들이 가장 되고 싶어하는 것은 과학자. 5,6학년 아이들에게 장래희망을 물으면60%이상은 과학자라고 답한다.
그러나 산수는 가장 싫은 과목. 이유는 시험이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체육이다. 아이들이 심하게 떠들 때 선생님의『조용히 하면 체육 하겠다』는 말 한마디면 금세 조용해질 정도다. 음악·미술도 좋아하는 과목. 그러나 예·체능과목의 별도 담임 제를 실시하고 있는 서울S초등학교 아이들은 미술을 몹시 싫어한다. 그 이유는 미술선생님이 점수를 잘 주지 않기 때문이다.
『전과와 문제집이 너무 많아 시험 공부하려면 너무 힘들어요. 그렇지만 가끔씩 시험문제가 일반문제집에서 그대로 나오는 경우도 있어 안볼 수 없어요.』
『이제 더 이상은 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중학교에 가면 지금보다도 더 공부를 많이 해야하고 시험도 더 힘들어진다고 하니 중학생이 되기 싫어요.』
『학교공부는 생활하는데는 별 쓸모가 없어요. 그렇지만 공부를 못하면 거지나 전과자가 돼요.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서 공부를 해야해요.』
이재분씨(교육개발원 선임연구원)는『요즘 아이들은 시험에 대한 강박관념 때문에 공부는 골치 아픈 것, 외워야 할 것 등으로만 생각해 공부의 즐거움을 잃어가고 있다』며『학교에서도 성적중심으로 아이들을 차별, 성적이 나쁜 아이들은 기가 죽고 비관을 해 자신의 다른 재능을 발견하지 못하고 계속 낙오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재은교수(이화여대 교육심리학과)는『국민학교는 일생중 가장많은 지식을 배우는 시기로 학교교육에 뒤떨어지지 않도록 지도하고 공부가 즐거운 것이라는 경험을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공부를 꼭 시험이나 학교성적과 너무 관련지으면 아이들이 공부를 짐스럽게 생각해 교육에 역효과를 낼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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