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내가 바다에 빠져 죽다 살아났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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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생산 야드 150만 평, 종업원 2만5000여 명, 2007년 예상 매출 15조2000억원, 수주 목표 181억 달러. 이것이 외형상 나타난 현대중공업의 현주소다. 여기에 9개의 대형 드라이 도크와 6기의 초대형 골리앗 크레인을 가동하면 세계 각국에서 주문하는 어떤 종류의 선박도 건조할 수 있다. 지금은 고부가가치 선으로 각광받고 있는 선박들만 선별해 수주할 정도로 콧대도 높아졌다.

실제로 향후 3년 동안 건조할 물량도 부가가치가 높은 LNG 운반선과 초대형 LPG 운반선이다. 그것이 무려 20척에 이른다고 했다. 이런 놀라운 성장의 이면에는 초창기 멤버들의 희생과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이른바 ‘캔두(can do)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진수식을 하기 전에 국내에서는 26만t급 선박을 시운전해본 사람이 없어 수입했을 정도라면 현대조선소 초대 사장은 누가 했습니까? 외국인이었습니까?
“그랬지. 스코(J W Schou)라고 덴마크 사람인데 덴마크가 원래 농업국가지만 우리하고 비슷한 환경에서 ‘오덴세 조선소’를 만들어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었어요. 거기 기술이사로 있던 스코를 사장으로 영입했어요. 그렇지만 기술사가 항해사는 아니기 때문에 그이도 진수식을 할 때는 벌벌 떨어, 하하항. 근데 스코가 고생을 많이 했어. 리바노스 측에서 파견한 감독관이 자꾸 트집을 잡으니까 노상 다투고 말이야. 선주 쪽에서 나온 녀석이라 사장 말을 잘 안 듣는 거지. 더러워서 참. 하여간 그래도 1, 2호선을 제때 진수시킬 수 있었던 건 스코 사장 노력이 컸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요.”

모두가 한마음이 됐기 때문에 열악한 조건들도 극복할 수 있었다는 얘기로 들린다. 김형벽 전 회장은 근무 환경도 차라리 그때가 좋았다는 말로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세상이 변했으니 여건도 변하고 의식도 엄청나게 달라졌지만 그때는 비교할 곳이 없으니까 자연히 불평도 나올 수 없었고 무엇보다 열심히만 하면 회사가 뒤에 있다는 그런 믿음이 아주 든든하게 있었어요.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 그랬을 겁니다. 내 경우에 우선 출퇴근을 회사 차로 했어요. 집도 회사 사택에서 지냈습니다. 당시에는 부장이라는 게 4, 5명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은 중역만 해도 중공업에서만 몇십 명 될 겁니다. 그러니 부장들도 차가 다 있고 운전사도 붙여주고 그랬지요. 그렇지만 가정은 희생시켰습니다. 가족이 모두 서울에 있으니까 한 달에 한 번, 1박2일로 가족 보러 갔다 오는 게 낙이었어요. 선박 건조가 시작됐을 때는 두 달에 한 번 정도? 그래도 불만들이 없었습니다.”

일주일은 ‘월화수목금금금’

하루 일과는 어떻게 짜였습니까?
“조선소에서 건조가 시작되고부터는 일요일이 없었지요. 금요일 다음은 토요일이 아니고 월요일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일주일이 7일인데 요일은 금요일까지밖에 없다고 얘기했어요. 월화수목금금금…. 하하하. 언젠가 코미디 프로에서 그런 소리 하는 걸 봤는데 ‘월화수목금금금’은 대한민국에서 우리 현대 직원들이 제일 먼저 썼을 겁니다. 그러고 지금 같으면 사람 잡는다고 할 겁니다만 그때는 오전 5시에 회의가 시작됩니다. 아침을 먹어가면서 공구별로 보고도 하고 지시도 받고 그러는 거지요. 지시는 주로 김영주 회장님이 했습니다만 시작하는 시간은 있는데 끝나는 시간이 없었어요. 이것 한 가지만 가지고도 하루 일과가 다 설명되는 거 아닙니까? 밤 10시에도 끝나고 11시에도 끝나고. 끝나면 근처에 큰 술집은 아니지만 거기서 피로도 풀 겸 가족 생각도 할 겸 1시, 2시까지 마시다가 다시 5시에 또 회의하러 나오고. 그래도 불만이 없었고 가족들한테 미안했지만 그렇다고 가족이 탈선했다는 얘기는 전혀 없었습니다. 가끔 짜증이 날 때는 있었겠지요. 그때는 ‘거지발싸개 같은 현대에 들어가서 아빠만 빼앗겼다’고 투정 몇 마디 한답니다. 하하하. 모두가 그렇게 지내온 겁니다.”

진수식은 성공적이었다고 들었는데 사실이 그랬습니까.
“누가 그런 소릴 합디까? (정 회장님이 그러시더라고 하자)에고, 회장님이야 그렇게 말씀하시겠지요, 하하하. 말도 마십시오. 결과는 성공적이었지만 진수식을 하는 과정은 쇼도 그런 쇼가 없었습니다. 진수식도 큰 행사 중에 하나거든요? 그때만 해도 처음으로 대형 유조선을 건조했고 조선 입국이 되느냐 안 되느냐 하던 시절이기 때문에 그게 국가적인 큰 행사였다고요. 명명식 때는 박정희 대통령까지 오시게 돼 있으니까 사실상 진수식이 예행 연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근데 진수식을 한다고 하면서 검사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해버린 거 아세요? 하하하. 원래 진수식은 모든 게 거의 완벽해야 하는 거거든요. 당장 운항을 해도 문제가 없다고 할 정도가 돼야 한다고요. 그런데 검사도 끝나지 않고 진수를 했으니 해프닝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우리가 배를 인도하고 그동안 시행착오에 대해 통계를 내니까 무려 104가지예요, 하하하.”

그 정도면 배를 다시 만든다고 했겠습니다. 검사도 끝나지 않았는데 진수식을 했다는 말씀은 없었는데?
“(웃으며)그게 현대 아닙니까. 날짜부터 잡아놓고 준비를 했으니 뭐. 그렇게 할 수 있는 분이 명예회장님이지요. 가만 보니까 그냥 놔둬서는 한도 끝도 없고, 더구나 선주 쪽에서 파견한 감독관이 자꾸 트집을 잡으니 검사를 다 받고 하자면 2, 3개월이 더 걸려도 진수가 안 될 것 같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진수부터 시키라고 고함을 치시는 겁니다. 스코 사장은 안 된다고 매달리고, 검사관도 나를 잡아먹으라면서 배 앞에 드러눕겠다고 아우성이고, 하하하.”

▶1973년 있었던 아틀랜틱 베론호 진수식.

굴뚝도 없이 새벽에 선체 진수

진수식은 선주가 정하는 게 아니라 제작사에서 정하는 것 아닙니까?
“그게 옳은 얘기죠. 근데 우리는 사실 그때까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회장님은 알고 계셨더라고요. 뭔가 하면, 진수를 언제 하느냐 하는 건 순전히 조선소 측에서 결정하기 나름이라는 겁니다. 왜냐, 진수를 해도 배에 이상이 있으면 뜨지 않을 것이고 문제가 발생하면 그건 결국 조선소만 손해거든요. 그러니까 검사를 다 받고 하건 안 받고 하건 진수는 야드가 판단할 일이다 그겁니다. 그걸 회장님은 벌써 알고 계셨는데 우린 바짝 쫄아서 검사관 달래느라고 절절매고 말이죠, 하하하.”

쇼도 그런 쇼가 없었다는 건 또 시행착오를 했다는 얘깁니까?
“지금은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데, 진수를 생전 처음 해보는 거니까 시행착오도 한두 가지가 아니고 엉망일 거 아닙니까. 거기다가 진수식을 하게 되면 별의별 소리가 다 나와요. 특히 일본 애들한테서 험담이 거칠게 나옵니다. ‘만용을 부려서 건조를 한답시고 용접을 하긴 했는데 배가 뜨나 보자.’ 이런 식의 악담이 막 나와요. 평소에는 점잖았던 사람들도 이상하게 진수식만 하면 그럽디다. 좌우간 진수를 하기로 하고 그때가 새벽 1시쯤 됐어요. 도크에 물을 넣으라고 명령이 떨어졌어요. 새벽 시간을 택한 건 일기예보를 보고 바다로 보냈을 때 물결이 최대한 잔잔한 시간을 택하니까 그래요. 그러니 천지가 조용하고 주변은 암흑이고 도크 주변만 불을 밝혀놓은 겁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전부 거대한 선채만 보고 거기에 압도당해서 진수 직전까지 굴뚝이 탑재가 안 됐다는 걸 몰랐어요. 난리가 났지요, 난리가. 하하하.”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웃음)그게 경험 미숙인데 회장님 눈빛이 독수리가 되고 이건 뭐 순식간에 난장판도 그런 난장판이 없었을 거예요. 욕에다가 고함에다가 전부 혼비백산할 지경이 된 거예요. 더구나 굴뚝이 매우 큽니다. 굴뚝 자체만 해도 25t, 30t 이상 나가요. 그걸 탑재 안 했다니 말이 됩니까?”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러니 뭐 크레인을 동원하고 전원이 달라붙어서 굴뚝을 크레인에 매달고서 대기를 했지요. 물이 다 찰 때까지 시간이 좀 있으니까 굴뚝 높이를 정확히 측정해서 대기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낭패가 있나, 이번에는 또 배가 뜬다는 걸 잊어버렸어요. 배를 뜨도록 만드는 게 조선소인데 배가 뜬다는 걸 잊어버렸으니 말이지요, 하하하. 수문을 열면 도크 바닥에서 이만큼(10m정도) 배가 올라오지 않습니까? 고것을 생각 못한 거지요. 그러니까 배가 앉아 있는 상태에서 높이를 측정해 대기했는데 배가 뜬 다음에 탑재를 하려니 높이가 맞습니까? 하하하. 그러니 정신 빠진 놈들이라고 회장님한테 욕먹고. 그런 정도로 경험이 없었던 거예요, 하하하. 그런데도 회장님은 멋지게 진수를 했다고 그러십디까? 다행이네요.”

그러나 시행착오는 다시 하면 되지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정 회장이 바다에 빠져 그야말로 ‘염라대왕 면담 직전까지 갔었다’는 회고담은 압권 중에 압권이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국운이 있었다는 느낌도 받게 됩니다만 회장님이 바다에 빠진 적이 있으십니까?
“하하항, 누가 그래? 내가 죽다 살아난 건 세 사람밖에 모를 텐데. (셋 중에 한 사람한테 들었다고 하자)
그러면 이정일이가 얘기했구만. 그 친구가 그날 당직이었어, 하하항. 그게 어떻게 된 건고 하니, 내가 여기 내려오면 여기서만(조선소 내) 내가 직접 몰고 다니면서 타는 캐딜락이 있어요. 번호판도 없고 조그마한 차야. 그걸 몰고 구석구석을 돌아보면서 잘못되고 있는 게 없는지, 잘되고 있는 건 뭔지, 꼭 새벽 4시면 일어나서 살펴요. 근데 그날은 비가 좀 왔어. 그래도 뭐 내 눈으로 직접 살피고 확인을 해야 마음이 놓이니까 둘러보러 나갔는데, 그때 이정일이가 부장인가 그랬을 거야. 돌아보다가 중간에 그 친구한테 뭔가 지시하다가 시간이 더 지체됐어. 탓을 하자면 그눔 때문에 빠진 걸 거야, 하하항. 좌우간 야드를 전부 돌아보는데 그날따라 비가 와서 그런지 라이트를 켰는데도 앞이 잘 안 보여. 그래가지고 차에 탄 채로 바다에 빠졌지 뭐. 하하항.”

정 회장은 간단히 회고했지만 당직이었던 이정일 전 미포조선 회장은 잊을 수가 없다면서 그날 있었던 일을 눈앞에서 보듯이 얘기했다. 다만 기억의 착오로 시점이 정 회장의 회고와 다소 차이가 있었다.

“명예회장님이 그런 말씀도 하십디까? 하하하. 회장님이 바다에 빠진 것이 1974년 봄인가, 그랬을 겁니다. 하필이면 그날이 내가 당직사령이어서 아주 죽는 줄 알았는데, 회장님이 바다에 빠졌으니 이건 뭐 내가 잘못한 것 같고 내가 끝까지 모셨으면 괜찮았을 거 아니냐 싶고 말이죠. 비상을 걸어도 중역들이 나타날 때까지는 안절부절못하고 죽을 지경이었죠. 근데 그날도 이상하게 마음이 찜찜하더라고요. 비는 억수로 쏟아지고.”

비가 많이 왔습니까?
“그때가 초봄이었던 것 같은데 그날따라 비가 아주 많이 왔습니다. 그래서 나 혼자 오늘은 순시를 하시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면서도 늘 해오시던 회장님이니까 감히 말씀도 못 드리는 거지요. 원래 회장님이 조선소에 오시면 어김없이 새벽 4시에 현장 시찰을 하세요. 한 2시간씩 혼자 현장을 샅샅이 뒤져보고 한 5분 정도 혈압 체크하고 6시부터 회의를 하십니다. 그런데 당직을 서면 당연히 회장님 동태를 살필 거 아닙니까? 말하자면 회장님 가는 코스를 지키고 있는 거죠. 비가 아무리 와도 회장님은 틀림없이 현장 시찰을 하시니까요. 그래가지고 도크 옆에 건조부라고 있는데 거기서 나는 회장님 동태를 살피는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회장님이 그쪽으로 오시더니 차에 타라는 거예요. 비는 억수같이 오는 새벽인데.”<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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