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의 처신과 책임(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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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이종찬씨의 처신을 보는 우리의 소감은 착잡하다. 민자당 탈당이 기정사실처럼 보이던 그가 돌연 잔류를 결정한 것이 나라나 정치발전을 위해 좋은 일인가,나쁜 일인가. 입장에 따라 혹자는 집권당의 내분수습으로 정국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란 논리를 펼 수도 있겠고,또 혹자는 이런 원칙도,소신도 없는 정치인의 행태가 정치판의 질서를 엉망으로 만든다는 비난을 퍼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은 그에 대한 평가가 정파와 시각에 따라 어떻게 엇갈리든 간에 그의 처신이 던져주는 정치인의 윤리와 책임에 관한 심각한 문제다.
정치가 원래 세력을 확보하고 유리한 입지를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고 정치경쟁의 본질이 여기에 있음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여기에도 최소한의 룰과 윤리,최소한의 명분은 있어야 하는 것도 역시 누구나 아는 일이다.
우리가 보기에 이씨의 이번 처신은 결과적으로 그의 정치입지는 유리하게 만들었을지 모르나 정치에 반드시 요구되는 윤리와 명분은 도외시한 처사라는 평가를 남길 것이다.
민자당 경선에 나선후부터 잔류결정에 이르기까지 그의 행보를 보면 한마디로 모순투성이였다. 그 자신 외압에 의한 박태준씨의 후퇴로 민정계 단일후보가 된 외압의 산물이었으면서도 외압을 구실로 경선을 거부한 것부터 그의 정치적 실수였다. 새 정치를 말하고 밀실정치를 공격했지만 스스로 구정치를 답습하고 결국 밀실정치로 진로를 표변했다. 양김 구도 청산을 외쳐놓고 이제 김 정권 창출에 밀알 노릇을 하겠다니 일관성도,신용도 찾아볼 수 없다. 그동안 몇차례 집회에서 수천명·수백명을 모아놓고 공언한 약속과 주장에 대해 이제 어떻게 뒷감당을 할 것이며,소수나마 따르던 지지자들에겐 무슨 설명을 하겠는가. 이씨는 이런 부분에 대한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고 본다.
우리는 이씨의 처신이 정국전개에 어떤 영향을 주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나라 장래에 어떻게 나타날지에 관해 섣불리 단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표변은 상식선에서 요구되는 정치인의 윤리와는 어긋난 것이며 우리 정계에서 이런 현상을 보게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임기초에 전국구의원이 탈당하고 무소속의원들이 선거때의 공약과는 달리 정당선택을 하는 등 그렇잖아도 최근 정치인의 윤리문제는 국민의 논란거리가 되어왔다. 정권교체를 앞두고 이런 현상이 더욱 심화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모든 정치인들이 정치에 있어서의 일관성·명분·윤리에 대해 새삼 냉정하게 스스로 돌아보기를 촉구하면서 우리는 대선을 앞두고 다시 자기가 책임질 수 없는 정치인의 언동이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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