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대통령 특별회견 일문일답] "불법 자금 있었던건 사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3면

노무현 대통령은 16일 회견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에 대해 "대한민국 사법부에서 가장, 아니 가장은 아니지만 아주 자질이 우수하고 자세가 바른 법관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盧대통령은 "정치의 운동장은 잔디구장이 아니고 진 뻘밭 구장이라 들어오면 사람이 변할 수밖에 없는가 보다"라고 말했다. 또 "저도 불법 자금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며 "저 스스로 추호도 모면할 생각이 없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한나라당 불법 대선자금의 10분의 1을 넘으면 정계 은퇴 용의가 있다"는 말이 잘못 전달됐다고도 하는데.

"뜻이 크게 왜곡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폭탄선언이나 승부수를 던지려 말한 게 아니다. 최병렬 대표가 내쪽은 그렇게 적냐고 하고, (야당이) 상식적으로 우리 절반이라도 받지 않았겠느냐는 의혹 제기를 했고, 그와 같은 보도도 나오고 있어 무척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그날(4당 대표 회동 때) 다시 얘기하길래 그만 좀, 그만 좀 무책임한 의혹 부풀리기는 그만했으면 좋겠다,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않도록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그런 말을 했다. 무책임하고 근거없는 의혹 제기를 통해 자기들의 책임을 줄이려 하는데, 빨리 차단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한나라당은 한나라당 나름대로 조용히, 법 절차대로 조사받고 우리도 조용히 수사 받으면 된다. 그래서 그런 말을 다시 하지 않도록 확신을 심기 위해 말한 것이다. 그냥 말하면 믿어주지 않으니 직을 걸고 맹세해야 믿어줄 것 아니겠나. 그 말이 적절하냐보다 사실이냐 아니냐가 중요하다. 오죽 근거없이 공격했으면 제가 그렇게까지 말하겠나."

-이회창 전 총재가 검찰 조사를 받았는데 대통령은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

"(잠시 허공을 보며 생각을 정리한 뒤) 선거 전후에 가까운 사람들이 李후보를 비난하면 내가 '李후보가 보통사람이 아니고 각별히, 각별히 잘 수련된 사람'이라고 항상 반론을 하곤 했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이나 난들 그렇게 큰소리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라는 얘기를 하곤 했다. 옛날 李후보가 정당에 들어오기 전에 제가 아는 법조인에게 '정말 이회창 후보가 법조계 안에서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느냐'고 물었더니 사실이라고 하더라. 그러나 스포츠에 비기면 대선 구장은 뻘밭 구장이다. 그 전에는 규칙도 거의 없고 마구 울퉁불퉁한 자갈밭 같은 데서 게임했다. 옛날엔 기울기도 한쪽으로 기운 비탈 구장이었다. 한쪽은 내려차고 한쪽은 올려 차는 …. 이젠 그렇지는 않지만 아직도 잘 다듬어진 잔디 구장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덜 오염됐을 것이라고 국민이 믿었던 분이 검찰로 출두하는 것을 보고 참으로 착잡했다. 그러나 어쩌겠나. 우리에게 미래가 남아있지 않다면 국민도 그 분을 용서하고 싶을 것이다. 저 스스로도 얼마나 다르겠나. 50보 백보 아니겠나."

-처벌보다 실상을 알리는 데 목적이 있다면 면책규정을 적극 제안할 용의는 없나.

"7월에 (기자회견에서) 제가 드린 제안은 좀 비현실적이었던 것 같다. 불법자금이 숨겨져 있는 게 이렇게 많은데 단서가 포함된 정당 장부를 감히 내놓을 수 있었겠나. 민주당, 아니 우리 선대위는 장부를 내놨었다. 세계 어느 나라 역사를 봐도 정치자금 고해성사가 한번도 없었던 것을 보면 준 사람과의 관계, 이런 게 어렵고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콜 총리가 정치자금 나왔을 때 끝내 출처를 묵비한 것을 보면 고해성사는 현실성이 없는 것 같다. 수사로 갈 수밖에 없다. (야당이) 검찰이 기업과 무슨 딜(거래)한다는데 저는 딜 안받고 그냥 수사하는 것으로 안다. 어떻든 저도 매우 힘들게 가혹하게 수사를 받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 면책 문제는 수사 끝난 뒤 국민여론 지켜보며 생각해볼 수 있겠으나 총선이 있어 대화와 협력보다는 대결적 분위기가 지속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썬앤문 그룹으로부터의 금품 수수 등에 연루된 측근 수사에 대한 소회는.

"(한동안 침묵 후) 미안할 따름이다. 심정으로야 모든 문제에 관해 속시원히 국민에게 말하면 마음이라도 좀 편할 것 같은데 그렇게 하기 어렵다. 제 얘기가 검찰수사에 대한 가이드라인으로 오해될 소지도 있다. 수사가 끝난 뒤 양심껏 보고 드리겠다."

-대통령직을 자주 내걸어 국민이 불안감을 느끼는데 대통령직에 대한 관은 어떤 것인가.

"국정의 최종적인 책임자며 국가 보위와 위기관리, 국민의 힘을 모을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 게 직무이므로 안정감과 신뢰감을 가져야 한다. 정직성.성실성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중요하다. 딴 나라에서, 하늘에서 온 어떤 사람이 아니라 국민과 살갗을 맞대는 낮은 대통령, 겸손한 대통령을 강조했는데 ("대통령직 못해먹겠다"는 발언은) 지나쳤나 보다. 그러나 재신임 얘기는 다르다. 대통령도 책임져야 한다. 지금처럼 흔들리는 대통령이 오래 가면 좋지 않다. 신임이 정리돼야 한다. 국민에게 다시 신뢰받고 일할 수 있는 신임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김성탁 기자<sunty@joongang.co.kr>
사진=신동연 기자 <sdy11@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