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동북아 공동체의 출발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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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만약 이 문제가 단순히 한.일 간의 양자 간 문제로만 남아있었다면 어떻게 진전되었을까 상상이 가능하다. 문제는 동북아 지역에서 과거사의 문제는 한 가지 사안이나 혹은 한 나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며, 관련된 문제들도 단순히 역사 연구를 통해 해결될 것도 아니라는 점에 있다. 역사란 원래 온갖 혼란스러우며 잔혹하고 부조리한 사실투성이다. 과거사에 관한 바른 접근이란 이 잔인한 현실에서 올바른 추론을 도출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지난 태평양전쟁을 돌이켜 봐도 다른 어떤 전쟁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어리석음이 빚어낸 참혹한 사건에 불과한 것이다. 어떤 명분으로도 이 참사에서 희생되고 고통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보상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무의미한 현실에서 어떤 긍정적 의미라도 찾으려 한다면 이것이 이념과 정치의 중심 무대에서 군국주의와 파시즘을 제거하는 계기가 됐다는 것을 들 수 있겠다. 이 점에 관해서는 자유주의 진영이건 사회주의 진영이건 공감하는 문제다. 우선은 군국주의의 대표적인 세력인 일본을 군사적으로 패퇴시키는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여기에는 미국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반세기를 넘는 시기에 걸쳐 동북아 지역은 가위 혁명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변화를 경험했다. 군국주의 일본이 하루아침에 자유민주주의 모범적인 사례로 바뀌었고, 다른 나라들 중에도 민주화를 이룩한 경우가 뒤를 이었다.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과 열정이 사라진 반면 수직적인 권위주의 대신 훨씬 다양하고 자유로운 문화가 자리를 잡아갔다. 무엇보다 물질적인 부와 생활수준의 엄청난 향상과 함께 부를 이룩하고 이를 즐기는 태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반세기에 걸친 기간에 동북아에는 어떤 분의 말과 같이 '천지개벽'의 탈바꿈이 있었던 것이다. 좋건 싫건 간에 이 큰 변화에 관해 다방면에 걸친 미국의 역할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지난 반세기에 걸쳐 오랜 안정기간이 있었고, 그 사이 이 지역은 세계 경제에서 점점 더 중요성이 증가했다. 더구나 이 지역은 인류의 앞날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는 문화적인 유산의 축적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기대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앞날은 결코 밝은 것만은 아니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의 지적처럼 이 지역에 팽배한 좁은 민족주의가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고, 그 중심에 과거사에 대한 혼란이 자리 잡고 있다. 과거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의 공유도 없이 각자가 자기의 입장에 맞춰 멋대로 생각하는 식이다. 큰 변화의 계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미국은 이 문제와 관련된 도덕적인 입장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 지역에서 그저 군사적.전략적.경제적인 이해관계에만 몰두하는 듯한 인상이다. 과거사에 관해 적어도 현재와 미래의 개척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기본적인 인식의 공유가 없이는 이 지역에 진정한 공동체의 형성은 불가능하다. 태평양전쟁의 종결은 일본인을 포함해 우리 모두의 승리여야 한다. 이 승리는 어떤 특정 지도자나 한 나라가 아닌 이 세상에 대해 겸손한 희망과 기대를 갖고 살아가는 모든 보통 사람들의 개가여야 한다.

특히 광복절은 어느 한 나라나 집단의 축제가 아니라 동북아 지역의 모든 사람이 함께 그 의미를 기억하고 축하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미.중.일.러, 그리고 남북한이 함께 모여 불행한 과거의 교훈을 되새기면서 눈앞의 과제들을 생각하는 엄숙하지만 즐거운 축제가 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해자였던 한국이나 중국이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의 진정한 사과와 반성이 가해자인 일본 측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라종일 우석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