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68)형장의 빛-제88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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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해인사에 입산하여 예비승려로서 기초수련을 쌓는 동안 공양주 (밥짓는 직책)·채공 (반찬 만드는 직책), 또는 부목 (나무하고 불 때는 직책)같은 육체적 노역의 소임을 거쳤다. 이런 힘든 일을 맡아봄으로써 아직 보잘것 없는 인간임을 인식시켜 쓸데없는 아만심을 없애자는 뜻에서다.
무릎이 깨지고, 도끼에 발등이 찍히고, 선배 승려에게 호되게 질책당하면서도 참을수 있었던 것은 출가할 때의 정신을 계속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착한 인생, 영원한 인생」을 살겠다는.
해인사에는 11개의 암자가 있는데 희랑대라는 암자는 절벽끝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암자에 계시는 안악이라는 노스님에게는 호랑이를 타고 다닌다는등 전설같은 소문이 따라다녔다.
부목을 맡았던 나는 어느날 희랑대의 안락스님을 찾아 몰래 올라갔다.
『부목행자인데 안락스님의 고명을 듣고 가르침을 받고자 왔습니다』하고 큰절을 하니 『원 별놈 다보겠군』하면서 싸늘한 욕을 하고는 배가 고프니 밥이나 좀 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평생 밥이라고는 해본일 없는 나는 그만 죽을 쑤어 고추장과 함께 상을 차려 스님 앞에 올렸다.
『이런 병신같은 놈. 밥도 제대로 못하면서 중노릇은 어떻게 해. 당장 나가. 나무할줄은 아니 따뜻하게 살수 있는 자격은 있어도 밥먹을 자격은 없어. 중이 절밥을 못먹으면 내려가야지.』
안락스님의 욕설 속에는 흘려넘길수 없는 영원한 진리가 있었다.
스님 앞에 큰절을 하고 지게를 짊어진채 발길을 돌렸다. 『밥지을 줄 모르니 먹을 자격도 없다는 말이 메아리처럼 뇌리에 번졌다.
수계를 받고 고행의 방탕생활을 거쳐 통도사·불국사·범어사·낙산사등 대사찰을 옮겨다니면서 불교경전을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나는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살라」는 석가의 가르침을 놓고 많은 고민을 했다. 중이 중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 영원하고 착한 인생을 살겠다고 출가한 내가 절밥을 제대로 먹는 중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평생 거리에서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위해 지내다가 거리에서 열반한 부처가 이땅에 나타나면 어디부터 제일 먼저 갈 것인가.
1966년4월 대구교도소에서 설교할 법사가 없다며 설교를 권유해왔다. 엉겁결에 교도소를 찾아 설법을 했다.
고통스런 상황속에서도 신앙을 갖고 열심히 살아가는 재소자들의 모습에서 「이곳이야말로 내가 찾아야 할 곳」이라는 결심을 하게 됐다.
나는 교도소를 찾아다니면서 그들의 「뜨거운 인생」을 배우다가 거리에서 이 세상을 떠난다면 그것이 가장 큰 행복이 아닐까 생각했다.
경북 달성군 옥포면 반송동 비슬산기슭 용연사 초입에서 왼쪽으로 5분거리에 있는 야트막한 산언덕에 드러누운 무덤들. 이곳은 대구교도소 무연고 재소자 공동묘지로서 전국에서 사형이 집행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묻혀 있고 묘지주인이 없는 무연고 묘지가 제일 많은 곳이다. 하늘아래 가장 슬픈 무덤인 것이다.
나는 매년 이곳을 찾아 국화를 꽂고 잡초를 뽑아주면서 이름모를 1백6기의 떠도는 혼들을 위해 천도재를 지내오고 있다.
이 무덤을 찾을때마다 나는 이지상에 이곳이 진정 마지막 불행한 무덤이 돼야 한다고 간절히 기원한다. 더이상 이런 무덤이 생겨나지 않도록 빌어본다.
얼굴도 모르고 죄명도 모르지만 용서받지 못할 사람이란 이세상 어디에도 없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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