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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후보들의 정체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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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그가 들고 나온 정책은 그야말로 극좌파적이다. 대통령이 되면 주당 근로시간 35시간을 30시간으로 줄이고, 개인이 국가에 진 빚은 모두 탕감하겠다고 공약했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에게 지금보다 더 많은 세금을 물리겠다는 약속도 했다.

1960~70년대 프랑스 공산당이 한창 잘나가던 시절의 공약을 떠올리게 한다. 저런 시대착오적인 후보에게 누가 표를 줄까 싶지만, 그는 이번 대선 1차 투표에서 4.08%를 얻어 12명 후보 가운데 5위를 차지했다. 군소 후보 가운데 최다 득표다. 그는 자신과 당의 신념에 걸맞은 정책을 내세웠고, 이를 보고 100만 명 이상이 표를 준 것이다.

브장스노와 정반대 입장인 극우파 장마리 르펜. 여든의 고령에도 이번 선거에서 300만 표를 넘게 얻었다. 그는 이민제도를 즉각 폐지해 '진짜 프랑스 사람'만 프랑스에 살 수 있게 하자는 주장을 74년 첫 대권 도전 이후 30년 넘도록 반복하고 있다. 부유세 즉시 폐지, 소득세 점진적 폐지, 상속세 폐지 등의 세제 개편 공약도 수십 년째 반복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비난했지만, 33년 전 0.7%를 득표한 그는 이번 선거에선 국민 열 명 중 한 명의 지지를 받았다.

이번 프랑스 대통령 선거전을 보면서 느낀 건 각 후보의 확실한 정체성이었다. 사회 문제 전반에 대해 세세한 항목까지 각 후보의 개성이 뚜렷하다. 공약으로 표현된 그들의 신념이 곧 그들의 정체성인 셈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면 유권자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표가 날아가지 않을까'를 걱정해 정책을 타협하지 않는다. 대신 자기 주장을 설득하는 데 주력한다. 유권자는 선거광고나 토론 등에서 각 후보의 정책을 유심히 듣고 설득력이 더 큰 쪽을 선택한다.

부동층이 1차 투표 직전까지 40%대에 육박하던 이번 선거에서는 특히 후보들의 적극적인 정책 대결이 유권자들의 선택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정책이 '판매 포인트'였던 것이다. 브장스노나 르펜은 극좌나 극우라는 이름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게 자신들의 신념이고 색깔이기 때문이다. 400만 명 이상의 유권자가 그들이 숨김 없이 드러낸 정체성을 보고 표를 찍어줬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역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 가운데 자기 정체성을 확실히 밝힌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공약은 표가 많이 몰리는 쪽으로, 또는 인심을 덜 잃는 쪽으로 튀었다. 후보의 정체성은 찾기 힘들었고, 엇비슷한 선심 공약이 난무했다.

브장스노의 '국민 부채 탕감' 약속은 한국에서 80~90년대 대선에서 여러 차례 등장한 '농민 부채 탕감' 공약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한국에선 이를 두고 '좌파 공약'이라고 지적하면 '색깔 공세'라며 핏대만 올렸다.

르펜이 주장하는 '상속세 폐지' '법인세 삭감' 등은 어느 나라든 우파 후보가 들고 나올 법하다. 하지만 한국에선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케케묵은 국가보안법 폐지 논쟁 정도가 후보의 정체성을 살짝이라도 보여주는 유일한 이슈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후보들이 표 때문에 눈치를 보며 자신을 감춘 것이다. 정체성을 제대로 밝히지도 않고 대통령으로 뽑아 달라는 건 도리가 아니다.

한국 대선이 7개월여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에는 좀 달랐으면 한다. 경선에서부터 대선 후보들이 자신의 'ID카드'를 확실하게 보여주자는 것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될 사람을 대충 당이나 얼굴만 보고 찍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한번 선택하면 5년간 애프터서비스도 안 된다는 대통령인데, 정체성과 정책을 제대로 보고 잘 골라야 하지 않겠는가.

전진배 파리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