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왕위(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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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승부의 세계는 냉혹하고 비정하다. 승자는 환호와 갈채속에 휩싸이지만 패자는 서서히 잊혀져 간다. 프로의 경우엔 승패의 명암이 더더욱 크게 엇갈린다. 이기는 자만이 살아남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영원한 승자는 없다. 스포츠에서도 그렇고 바둑에서도 그렇다. 지는 쪽이 있어야 이기는 쪽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패배의 쓰라림을 맞본 사람이라야 승리의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국내 최고 권위의 바둑 타이틀전인 왕위전의 75년도 제10기 도전전에서 타이틀 보유자인 김인을 물리치고 처음 왕위에 오른 서봉수는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기쁘다기보다는… 허탈하고 두려워요.』
허탈한 것은 정상을 차지하기 위해 걸어온 길이 너무나 험난했기 때문일 것이고,두러운 것은 언젠가는 다시 정상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과연 서봉수는 이듬해 타이틀을 조훈현에게 내주었고,80년에 그로부터 다시 타이틀을 빼앗았으나 81년에 또다시 조훈현에게 무릎을 꿇는 수모를 겪었다.
왕위전은 60년대 이후 한국 바둑사의 한 축도다. 26기를 거치는 동안 타이틀을 가져봤던 기사는 전체 기사 1백13명 가운데 겨우 6명 뿐이다. 앞에 거명한 3명외에 하찬석이 73년에 한차례 가져봤었고,작년에 이창호가 스승 조훈현을 꺾고 파란을 일으키며 정상에 오르더니,25일의 제26기 도전 7번기 승부 마지막 대국에서 이창호는 라이벌 유창혁에게 타이틀을 내주고 말았다.
작년 이창호가 왕위에 올랐을때 팬들은 90년대가 이창호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의 나이가 어리고 기재가 워낙 출중한 탓이었다. 그러나 유창혁이 새 왕위에 오름으로써 그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당자들은 고통스럽겠지만,그래서 승부의 세계는 재미있다.
유창혁의 바둑을 「봄날」에,이창호의 바둑을 「겨울」에 비유한 바둑기자가 있다. 유창혁의 기풍이 화사한데 비해 이창호는 은인자중의 기풍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두사람의 승부는 끝난 것이 아니다. 바둑은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느쪽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느냐,그것이 앞으로 두사람의 승부를 가름할 것이다.<정규웅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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