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두려운 마음으로 민심에 귀를 대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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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한국의 현대사에서 선거 민심은 역사를 바꾸어왔다. 위장.오만.거품.부실.부패는 여지없이 심판을 받았고 정국은 요동쳤다. 민심은 지난해 5.31 지방선거 이래 숨을 죽이고 있다가 그제 4.25 선거에서 무서운 얼굴을 드러냈다. 집권 대세론에 빠져 있던 제1당 한나라당의 오만.거품.부패에 냉혹한 펀치를 날린 것이다. 당은 "스타 두 명만 합쳐도 지지율 70%"라고 거들먹거리다가 펀치 한 방에 휘청거리고 있다.

한나라당을 비롯한 정치세력은 민심의 가공할 위력에 다시 한번 놀랐을 것이다. 그들은 역대 선거 민심사(史)를 다시 들여다보아야 한다. 유신 시절 공화당은 장기 집권을 자신하다가 1978년 12월 10대 총선에서 야당 신민당에 1.1%포인트 졌다. 정권은 내리막길로 치달았고 이듬해 10.26이 왔다. 85년 2월 12대 총선에서 민심은 관제 야당 민한당의 거품을 날려버리고 정통 야당을 되살려냈다. 이 선거는 한국 민주화의 도화선이 됐다. 88년 4월 13대 총선에서 유권자는 여소야대를 만들어 노태우 정권을 견제했다. 광주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의 진상이 드러나고 5공 비리가 단죄됐다. 가장 가깝게는 지난해 5.31 지방선거가 있다. 민심은 노무현 정권의 부실과 위선을 가차없이 꾸짖었다. 열린우리당은 회복 불능의 상처를 입었고 결국 이번 선거에서 제대로 후보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5.31은 열린우리당만의 교훈이 아니었다. 한나라당은 방심하면 민심의 칼이 언젠가는 자신들에게도 향한다는 걸 그때 알아챘어야 했다. 하지만 당은 소중한 학습 기회를 놓쳤다. 지지율 1등 후보 진영은 과거의 비리에 겸허할 줄 모르고 대세론으로 의원들을 압박했다. 2등 후보는 '선거 구원투수'의 신화에 빠져 자신의 거품을 몰랐다. 어느 소장파 후보는 자신의 지역구가 비리 소동의 진원지였다. 당 대표는 지역구 구설에 말려 있고 지도부는 양대 주자 세력 사이에서 지도력을 잃었다. 개헌 문제 당론을 정하는 중요한 회의에 겨우 의원 30여 명이 '옹기종기' 모일 정도였다. 지역에선 공천을 팔아먹은 자도 있었다.

12월 대선까지 이제 선거는 없다. 민심은 다시 은신처로 들어갔다. 여론조사가 있기는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보듯 인기도와 민심은 다르다. 이번에 참패한 한나라당이나, 실낱같은 숨을 쉬고 있는 열린우리당이나, 명분 없는 신당 타령에 젖어 있는 범여권의 여러 정치세력은 두려운 마음으로 민심에 귀를 대야 한다. 그 학습을 가장 게을리하는 자가 12월에 가장 불쌍한 희생자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