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우는 도시, 비우는 도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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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도시의 무질서는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좁은 시각에서 비롯됩니다. 전체적인 관점을 잃어버린 채, 불필요한 시설물들이 세워지고 누적돼 끝없이 채워나가는 곳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채우기만 하는 도시는 시민들에게 행동의 제약을 느끼게 하며, 시각적 혼란을 초래합니다. 시설물들이 보행로를 무분별하게 잠식해, 시민들은 이를 피해 다녀야 하는 상황입니다. 과장된 지하철 입구 캐노피(덮개지붕●2)와 조잡한 입간판●1, 안내판이 덕지덕지 붙은 버스정류장은 보행자의 시선을 차단해 좁은 도시를 더욱 답답하게 만듭니다.

빽빽하게 채워진 도시에서 시민들은 과잉정보와 소음 등으로 스트레스를 느끼게 됩니다. 개인 공간에서는 주의를 집중하기 위해 문을 닫고 음악을 끄는 등 외부 자극을 스스로 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공환경에서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는 시민은 길을 가는 단순한 활동을 할 때도 스스로 안전을 지키기 위해 신경을 무진 써야 합니다. 시민들은 시설물의 숲 속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시설과 정보를 찾기 위해 마냥 두리번거려야 합니다.

과밀로 인한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제 도시를 비우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선 불합리하거나 불필요한 요소들을 제거해 나가야 합니다. 아무런 장식도 없고 캐노피도 없는 포르투갈 포르토시의 지하철 입구●3는 시각적으로 열려 있어 시원하게 경관을 조망할 수 있습니다. 자연히 지하철 입구사인은 더욱 돋보입니다. 세계의 선진도시들은 이런 장애가 없는(barrier free) 설계로 일반시민은 물론 장애인과 고령자도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들어 갑니다. 또 시설물의 투명성을 통해 시각적으로 비워진 느낌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베를린의 포츠다머 플라츠에 설치된 안내판●4과 파리의 버스정류장●5은 투명성을 높여 부피감을 최소화하고 있습니다.

정온하고 쾌적한 도시, 모두가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도시는 채우기보다 비우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도시의 비워진 공간은 기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활동으로 채워집니다.

권영걸 한국공공디자인학회 회장
서울대 디자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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