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대표의 숙제(유승삼 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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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 3일에 있었던 편협조찬간담회에서 다시 김영삼씨를 가까이 대하게 되었을때 맨먼저 떠올랐던 것은 지난 87년에 그에게 투표했던 사람들로부터 들었던 경험담이었다.
당시 김영삼 후보나 김대중 후보에게 투표했던 사람들은 그 12월16일밤에 경험해야 했던 고통과 울분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잊지못할 87년 대선
한동안 그들은 이야기를 꺼내는 것부터 피했다. 시간이 그것을 체념으로 바꿔놓은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 둘 씁쓰레한 얼굴들로 자신이 누구를 찍었으며 왜 그렇게 했는가를 털어놓기 시작했는데 김영삼씨를 찍었다는 사람들중엔 다른 무엇보다도 그가 김대중씨보다는 당선가능성이 높아보였기 때문에 선택했다는 사람들이 생각밖으로 많았다. 그들은 「군정종식」만은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표몰아주기로 다른 모든 것을 제쳐놓고 그에게 표를 던졌다고 했다. 김영삼씨가 김대중씨에게 12만4천여표 앞설 수 있었던데는 분명 그러한 요인도 컸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굳이 따지자면 김영삼씨는 김대중씨보다 국민에게 더큰 부채를 지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 김영삼씨가 이제는 그가 그토록 타도를 외쳤던 노태우씨와 한 솥밥을 먹으며 이번에는 여당의 대통령후보를 자임하고 나서 5년전 그때처럼 언론인들을 상대로 다시 통과의례를 밟는걸 신문이나 TV로 대하면서 당시의 지지자들은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그때의 상처들은 다 아물었을까. 간담회 내내 이런 상념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아무려나 이제 김영삼씨는 옛날의 김영삼이 아니다. 또 그래서도 안된다. 비단 그의 정치적 위치와 입장이 달라졌대서가 아니라 국민이 그를 보는 시선이나 기대부터가 달라졌다.
그가 3일의 간담회 연설과 답변과정에서 가장 힘주어 말한 것은 문민정치와 도덕성이었으나 5년전과는 달리 지금의 그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다는 건 뜻밖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설득력이 달랐다.
○달라진거 뭐가 있나
그의 말대로 문민정치의 기반을 확고히 하는 것은 여전히 이 시대의 과제이긴 하지만 현재는 6공의 핵심인 그가 야당후보가 내세울 주장을 스스로 하고 있다는 건 아무래도 이가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가 우리 정치지도자중 상대적으로는 우위를 점했던 도덕성도 3당통합으로 희석된 상태다.
그로서는 그의 변신이 구국의 결단이요,민주화와 문민정치를 위한 고육지계였겠지만 그것은 어느날 그렇게 말로 한다고 해서 입증되는 일은 아니다. 90년 1월 3당통합직후의 여론조사에선 50%가까운 국민이 일단 그 취지를 찬동한 것으로 나타났었다. 이에는 정국의 안정외에도 국정의 실질적 권한을 가진 여당안에서의 김영삼씨의 역할에 대한 기대도 컸기 때문이라 믿어진다.
그러나 그뒤 2년여동안 김영삼씨는 그가 이제 다시 새삼스레 새시대의 정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민주화」와 「문민정치」의 발전에 과연 얼마나 기여했던 것일까.
이번 총선 결과로 보면 그의 여당내 역할이 국민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는 못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그가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은 지금 국민이 그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가 다시 민주투사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여권의 대통령후보에 걸맞은 현실감각과 현실주의에 입각한 국가관리능력을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3일의 간담회에서 그는 나름대로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에 노력해온 흔적은 보여주었다. 이제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돼버린 「학실히」에서 여전히 벗어나진 못했으나 조용한 대화의 자리여서 였는지 지난날처럼 발음이 심하게 거슬리게 들리지는 않았다. 경제공부를 1년여동안 하고 있다고 스스로 말하기도 하고 간단한 경제현실은 통계숫자를 들어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그의 답변은 아무런 새로운 기사거리가 되지 못할 정도로 변함없이 당연한 원칙론에 머물고 있었다. 논리에 깊이와 체계가 부족한 것도 여전했다. 어휘가 부족하고 사용이 정확하지 않은 점도 마찬가지였다. 5년전엔 그의 이러한 면이 더 인간적이고 친근감을 주기도 했지만 더 이상 그것이 매력이 될 수 없다고 느껴졌다.
○통치능력 보여줘야
그는 우선 당내 경선이라는 예선을 거쳐야 하지만 현재로선 누가 맞서든 대중적 인기면에서 그를 능가할 인사는 없다. 또 어떻든 30년을 정치지도자로서 활동해왔다는 건 누구도 폄하하기 어려운 능력이 있음을 말해준다.
다만 이제 그는 이 나라 장기적 청사진과 국가관리 능력을 구체적이고 체계있게 제시해주어야 할 책임과 과제를 안고 있다.
억양은 어쩔 수 없다해도 발음은 더 애써 고쳐야 한다. 「학실히」와 「겡제」를 연발하며 원칙론에만 맴도는 건 그에게는 물론 국민으로서도 아쉬움이 남는 일일 것이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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