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국 태도와 습관 (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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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프로기사들 중엔 훌륭한 대국 태도를 가진 사람도 적지 않다. 하루종일 대쪽같은 꼿꼿한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는「대쪽 과묵형」은 가위 모범적이다. 그런가 하면 돌부처처럼 떡 버티고 앉아 그 자세부터 상대방에게 위압감을 주는 「돌부처형」도 비슷한 유형이다.
62년8월1일 여섯살 어린 나이에 『명인이 되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습니다』라는 비장한 약속을 남기고 일본으로 바둑수업을 떠났던 조치훈은 18년간의 각고 끝에 마침내 명인타이틀을 쟁취, 금의환향하여 한국이 낳은 또 한사람의 천재기사 조훈현과 KBS-TV에서 기념대국을 가졌다.
81년 1월 초순의 일이다. 말이 기념대국이지 불세출의 두 천재가 벌이는 일국기는 그 어떤 시합보다 바둑 팬들의 관심이 쏠렸었다.
그때 TV에 비친 두 사람의 대조적인 대국태도는 대단한 화제가 되었었다.
조치훈이 돌부처처럼 버티고 앉아 미동도 하지 않는 훌륭한 자세인데 비해 조훈현은 줄담배에 다리를 달달 떠느 등 초조한 기색이 역력하여 바둑을 모르는 사람들까지도『저 사람 둬볼 것도 없이 졌구먼』이라고 했을 정도였다. 조치훈이 모범적 태도로 국내 바둑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준 반면 조훈현에겐 힐난과 항의가 빗발쳐 바둑을 진 것 이상으로 아픈 상처를 입었었다.
그후 10여년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조훈현은 국내에서 세차례나 천하통일을 이룩하고 응창기배 우승으로 세계 바둑 황제로 등극하는 등 국민적 영웅이 되어 MBC-TV에서 한·일속기전 우승자 자격으로 조치훈과 다시 대결했다. 작년의 일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훈현이 자신만만한 태도인 반면 조치훈은 계속 큰 소리로 자신을 꾸짖는 등 예전 같지 않은 자세로 임관하다가 바둑도 져 승부 세계의 무상함을 실감케 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최근에는 조훈현의 제자 이창호가 역시 같은 자격으로 MBC-TV에서 조치훈과 대국했었다. 이때도 판세가 불리해진 조치훈은 주먹으로 자기 머리통을 때리면서 『이런 바보 같으니…』하고 요란한 제스처로 자책했고 그 순간 깜짝 놀란 이창호는 대마잡는 결정타를 놓치는 바람에 형세역전을 허용했다가 조치훈의 실수로 다시 판세를 뒤집고 승리했다고 해 화제다.
우리의 자랑이요, 국민의 영웅인 조치훈이 그 훌륭하던 대국 태도를 어디에다 분실한 것일까. 고달픈 승부사 생활의 스트레스 때문인가. 여러해전 당한 교통사고의 후유증 탓인가. 지난날 돌부처와도 같았던 그 모범적 자세를 잊지 않고 있는 우리는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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