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의 오늘날의 의미(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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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해마다 3·1절이면 한일관계를 돌이켜 보고 새로운 다짐을 하는 것이 의례적인 말치레처럼 되어 왔다. 50년 가까이 굳어진 질서의 틀속에서 지난 역사의 책임을 따지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데 집착하여 거시적인 안목으로 앞을 내다볼 여유를 갖지 못했던 탓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최근 몇년동안 극적으로 빚어지고 있는 변화는 그러한 틀에 박힌 생각과 행동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시대에 맞는 신사고는 비단 옛 소련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하다. 우리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한일관계에 관한한 불행하게도 우리는 아직도 그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기본조약이 체결되고 국가관계가 정상화된지 30년 가까이 되는 지금까지 지난날의 상처가 기회있을 때마다 들추어지며 두나라 관계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우리는 그 책임을 항상 일본의 잘못된 역사인식에 있는 것으로 알고 과거역사에 대해 솔직한 반성을 하도록 촉구해 왔다. 그러나 일본은 지난날 군국주의시대에 우리나라 뿐 아니라 이웃 여러나라에 대해 저질렀던 과오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반성한 일이 없었다.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어 가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3·1절을 맞으며 우리는 그러한 일본을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소련이라는 거대한 세력이 소멸되면서 나타난 힘의 공백을 일본이 메우려는 의사를 보이고 그 가능성도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소위 평화헌법을 편리하게 해석해 일본전투부대를 해외로 보내려는 움직임이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 되려는 일본정부의 방침들은 그 당위성 여부를 생각하기에 앞서 우선 강한 거부감과 경계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경제규모나 국력에 맞게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책임을 떠맡고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은 누구의 눈으로 보아도 합당한 일이다. 그러나 그 책임을 떠맡으려는 주체가 단순히 과거와 같은 강자의 논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군국주의 시대의 침략을 진출이라는 말로 얼버무려 후세에 가르치고 2차대전의 책임이 다른 교전상대국에도 있다고 주장하는 인사가 정부 고위직에 있는 한 일본의 정치·군사 대국화 움직임은 우리에게는 경계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최근 대두되고 있는 정신대문제에 관한 일본의 태도등은 그러한 경계심을 깊게 할 뿐이다.
그러나 이에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 역시 구태의연하게 너무 감정적인데 치우치지는 않았는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일본의 잘못된 인식에 대해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50년 가까이 상투적으로 굳어져온 사고방식으로 행동하지 않았다고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3·1절은 단순히 지난날 분출됐던 민족의 역량을 자랑하고 되새기는 행사로만 지나서는 안된다. 이제는 스스로의 잘못도 깨우치고 미래지향적인 역량을 기르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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