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멋진 할머니와 사랑 나누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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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나이 예순이 넘자 모든 게 생각과 달라졌다. 나는 나이가 더 들면 모든 게 차곡차곡 정리돼 안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순이 넘고 거기에 두 살을 보탠 지금, 매일매일 처리해야 할 일들에 싸여 거의 익사 직전이다. 사실은 그것에 감사한다. 바쁜 일의 핵심이 '연극'이기 때문이다.

소설가는 소설을 쓰는 것으로 독자들의 성장을 돕는다. 건축가는 건축으로, 가수는 노래로 다른 사람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고 참여하는 것이다. 연극배우가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방법은 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다. 63빌딩에 비교하면 연극 공연장처럼 왜소한 것도 없지만, 적어도 관객과 함께 있는 동안의 시간과 공간을 서로 완벽하게 나눌 수 있다. 그때 나는 '나의 삶인 그들의 삶, 그들의 것인 나의 것'이라는 합일을 느낀다. 그 순간은 내 가족도, 연인도, 그 누구도 뺏을 수 없는 연극배우인 나만의 것이다.

얼마 전, 온 몸이 마비된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발가락 하나를 움직이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했다. 단지 발가락 하나를 움직이는 데 전존재를 바치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내가 연극을 통해 원했던 게 거창한 게 아니었다는 진실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사지가 마비된 그 사람에게 발가락 하나만을 움직이게 만드는 만큼의 힘을 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나의 배역은 늘 진짜 나이와 상관없었다. 극중에선 지위나 직업의 높고 낮음, 돈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시공으로부터 자유로우니까. 20대에 아흔살 노파를 연기했었다. 58세에는 28세 처녀였으며, 예순둘엔 50세 엄마가 되기도 했다. 스스로 늘 숫자에 서투른 백치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내 삶은 늘 하나의 숫자가 주는 강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다. 아이러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목표가 생겼다. 그 목표 또한 숫자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올해 초 나는 '19 그리고 80'이라는 연극을 공연했었다. 19세 소년 헤럴드와 80세의 모드가 만나 인생과 추억과 사랑을 교환하는 이 연극은 처음엔 나의 숱한 연극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공연이 진행될수록 이 연극은 마치 피부처럼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극중에서 내가 연기하는 모드의 나이가 여든살이 아니었다면 그런 꿈을 가지진 않았을 것이다. 80이라는 나이로 표현되는 모드의 삶이 나에게 구체적인 메시지로 다가왔다. 내 나이 80까지 공연해야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숙명적 강제성을 느낀다 해도 배우에게(혹은 누구에게라도) 80이라는 나이는 사실 하나의 추상이다. 수명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며, 그 나이까지 무대에서 꼿꼿하게 연기할 수 있는 축복이 내 것인지는 더욱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80이라는 나이는 모드의 말처럼 '이 세상을 떠나기에 너무 아름다운 나이'인 것이다.

나는 모드가 19세 헤럴드에게 주는 사랑과 지혜를 관객에게 나누어주고 싶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19세의 젊은이들에게 삶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을 선물하고 싶었다. 이제, '19 그리고 80'을 공연할 때 또하나 나만이 가질 수 있었던 즐거움을 고백하겠다. 가끔 젊은이들이 맨 앞줄에 계란 꾸러미처럼 앉아 있는 것을 볼 때 나는 연기 중인 채로 짓궂은 위트를 보낸다. "너희들 솔직하게 말해봐. 사실은 이 할머니하고 연애하고 싶지?"

모드처럼 멋진 할머니가 많았으면 좋겠다. 아름다움을 보고, 낙조라든가 갈매기를 보고 울 수 있는 할머니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내가 그녀를 보며 예순둘에 새로운 꿈을 가질 수 있었던 것처럼.

박정자 연극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