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지 도난 「공다툼수사」/최훈 부천 사회1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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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후기대 시험지 도난사건의 수사과정을 취재하노라면 희극영화를 보는듯한 느낌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시가 1천5백원(제작단가)에 불과한 종이뭉치(시험지)의 도난이 몰고온 엄청난 여파는 물론이거니와 경찰의 수사과정 또한 촌극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22일 오후 10시쯤 경비원 정계택씨(44)를 부천경찰서 형사계로 데리고 들어온 경찰은 득의만면한 표정으로 『범인검거』를 큰 소리로 외쳐 검거가 자신들의 공임을 확인시킨뒤 도경간부의 『검찰에 공을 뺏길지도 모른다』는 우려아래 연행 15분만에 「범인」정씨 검거를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마감시간에 쫓긴 일부 언론들은 형사계장실로 들어간 「범인」정씨와의 면담이 이루어지지 않자 임의로 일문일답을 작성했다가 다음날 정씨가 진술을 번복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경찰은 정씨가 계속 진술을 번복하는 바람에 정씨가 보도진에 어떤 엉뚱한 말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40여시간 동안이나 정씨를 형사계장실에 가둬놓고 대·소변을 보게하며 수사할 수 밖에 없었다.
특진을 기대하며 의기양양해 있던 경찰간부들의 얼굴에 『결과가 잘못되면 문책등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이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경찰은 정씨가 자꾸 진술을 번복하자 최후의 카드인 매달기(가혹행위)를 해보려 했으나 출입문을 사이에 두고 1백여명의 기자가 몰려 있는데다 악역을 맡을 사람을 못찾아 고민하다 24일밤 자원자가 나타나자 『청소를 할테니 나가달라』며 형사계 출입문을 잠근뒤 식사를 가져가는 것처럼 중국집배달통에 겨자와 물수건을 갖고 들어갔으나 정씨가 이미 탈진상태라 포기하는등 웃어넘기지 못할 코미디를 연출하기도 했다.
경찰의 한 간부는 상부에 보고하지 않은채 정씨의 횡령혐의 고소인인 오모씨에 대한 수사를 몰래 진행하다 도경에 알려져 알력을 빚는등 공다툼 수사는 줄곧 계속됐다.
경찰이 아무런 물증이나 배후세력을 찾아내지 못하고 수사진전이 없어 속보기사에 애를 먹던 보도진들 사이에는 『신춘문예 발표장이 돼 버리는 것이 아니냐』는 농담이 나돌기도 했다.
사건현장인 서울 신학대에서는 학장지지파와 반대파가 같이 있을 때는 『왜 자꾸 학교를 들쑤시느냐』며 언론에 화살을 돌리다가도 단독으로 만났을 때에는 상대방에 불리한 정보를 계속 흘렸다.
결국 합리적 수사를 외면한채 정씨를 31일 횡령혐의로만 검찰에 송치할 수 밖에 없었던 경찰은 『지나친 희극은 비극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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