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의 사회(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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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최근 며칠간의 신문을 들춰보면 기사곳곳에서 「미궁」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있다.
국교생 이형호군 유괴살해사건이 미궁에 빠진채 1년을 맞게 됐다는 기사,후기대 입시문제지 도난사건이 서울신학대 경비과장의 돌연한 자살로 미궁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기사,여야의 공천작업이 미궁속을 헤매고 있다는 기사따위가 그것이다.
그러나 미궁에 빠져있는 일들은 이뿐만이 아니다. 얼른 떠오르는 사건만 해도 화성연쇄살인사건,고문경관 이근안씨 잠적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이쯤되면 우리사회는 그 자체가 미궁이나 아닌지 착각이 들기까지 한다.
「사건이 얽혀서 쉽게 해결되지 않는 것」을 뜻하는 말로 씌어지고 있는 「미궁」(labyrinth)은 본래 에게해 남단 크레타섬의 옛수도 크노소스에 있었던 왕궁을 가리킨다.
현대에 이르러 발굴된 미궁의 자취는 조그마한 방이 수없이 많고 통로도 복잡하기 이를데 없어 「한번 그 속으로 들어가면 도저히 나올 수 없다」는 그리스의 전설을 뒷받침한다.
번영을 구가하던 크레타섬의 문화가 붕괴된후 이 미궁에는 머리가 소,몸체가 사람인 거대한 괴물 미너토가 살고 있었는데 왕 미노스는 이 괴물을 무마하기 위해 9년마다 14명의 소년소녀를 공물로 바쳐 먹이로 삼게 했다는 것. 공물로 바쳐진 소년 가운데 티시우스라는 영웅이 공주 아라드네의 도움으로 미너토를 죽이고 미궁을 탈출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 미궁에 관한 일은 기록으로도,이야기로도 전해 내려오는 것이 없다. 곧 미궁에 관한 이야기는 완전히 미궁속에 빠지고 만 것이다.
그 미궁이 해결되지 않는 사건이라는 뜻으로 씌어지기 시작한 것이 3000∼4000년전부터라고 하니 그 역사는 꽤나 오래된 셈이다.
동·서양,선·후진국을 막론하고 미궁이 많은 사회는 그만큼 문제의 소지가 많은 사회로 꼽혀 왔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고 인간의 두뇌가 아무리 빠른 속도로 지능화해도 미궁속에 빠지는 사건을 해결하는데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게 일반적인 정설이다. 범죄의 지능화가 해결하는 쪽의 지능화를 훨씬 앞지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미궁속에 빠진 사건들을 그대로 방치해 두려는 자세다. 지금 우리 주변에 깔려있는 수많은 미궁들에 대해 해결해야 할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정규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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