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배 두 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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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종가 시사에 다녀 온
큰 조카는
옛날 할머니가
들고 오신 절편대신
참 이쁜 열매 두 개를
주머니에서 내민다
모든 것이 간편해진
섭섭함에 잠기면서
닳아지는 인정을
가지런히 놓고 보니
선산에 봉긋하게 핀
조상 님 무덤 같다
가을볕에 타신 얼굴
일년 내내 배빛이더니
무덤 빛도 세월 속에
배빛으로 익을 테지
쓴맛은 다 삭이시고
단맛만 주신 산배 두개.

<시작 메모>
우리 고향엔 동지를 앞두면 시제가 산수유 열매처럼 익는다.
어른과 아이들이 한마당 어울릴 수 있는 잔치, 산과 들에서 자연을 가장 가까이 만날 수 있는 기쁜, 경건한 모습이 혈연을 더욱 따뜻이 감싸준다.
아낙네들은 집안 음식장만과 제 준비로 집에 남아 분주히 돌고, 남정네들은 한문중이 모여 허연 옷깃을 나부끼며 갈대숲길을 걸어선 산으로 가신다. 선대부터 차례로 제사를 올린 뒤 둘러앉아 음복하는 가운데 누구네 아들자랑, 손자자랑이 조촐하게 북을 울린다.
해가 설핏해서야 아름아름 먹고 남은 음식들을 싸안고 집으로 오는데, 그때 그 떡은 추자 만한 것이 아니라 두툼한 인심의 긴 떡가래가 팔 길이만 했다.
그것이 근래에 와서는 차츰 줄어들더니 이제는 아예 간략하게 없어져 버렸다.
이번 설날과 대보름에는 그런 고향모습이 되살아날는지….

<약력>
▲39년 상주 출생.
▲8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탄산 일우』당선.
▲88년 시조집『지붕 위의 새들과』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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