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구 칼럼] '민족공동체 통일안'살리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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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정치적 대치 상황이 하도 답답하다 보니 먼 옛날도 아닌 15년 전, 1988년 총선으로부터 시작됐던 13대 국회 시절을 회상하게 된다. 그때가 그립다는 뜻은 물론 아니고, 태평성세였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지금의 혼탁한 상황보다 여야 간에 정치적 대화의 길이 조금 더 트여 있던, 따라서 덜 답답했던 시절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민주화 과정은 그 초기보다 상당히 진전된 시점에서 더 큰 파란과 암초에 부딪칠 수 있다는 라틴아메리카의 교훈이 우리의 경우에도 적용되는 것이 아닌지 심히 걱정스럽다.

*** 타협의 정치로 빛본 통일분야

87년 6월항쟁, 6.29선언, 12월 대통령 직선으로 이어진 드라마는 권위주의 시대의 폐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민주화세력이 후보 단일화에 실패함으로써 불과 36.7%의 득표로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이 88년 2월에 취임했고, 그로부터 두달 후 13대 총선에선 야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해 4당이 운영하는 여소야대 국회의 시대를 맞게 됐다. 결국 대통령.국회.여야4당 가운데 그 누구도 국민의 절대다수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는 불안정한 상황이었고 이를 각 정당이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서로가 타협의 정치를 시도하는 길밖에 없었다. 적어도 통일 분야에서는 상당한 정도의 대화와 타협에 의해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는 데 성공했었다.

권위주의 시대의 폐막은 무엇보다 언론의 자유를 부활시켰고 이는 곧 열띤 통일논의를 분출시켰다. 대학.시민단체.언론이 마련한 토론의 장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고, 방송은 심야까지 특별프로를 마련했으며 국회의 통일특위가 주관한 공청회도 여러 날 계속됐다. 이러한 통일논의의 열기는 자유와 통일에 대한 국민적 바람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극적으로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당시의 통일원 장관은 내각의 누구보다 국회의 4당, 특히 3야당 총재와 협의해 절충을 거듭하여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그 후 10여년에 걸쳐 적지 않은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아직도 그 방안이 대한민국의 통일방안이라는 데 큰 이론이 없는 것은 오히려 세력 분점이 낳은 타협의 정치 덕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탄생시킨 80년대 말의 통일 열기가 그 후 식어간 것은 아니겠지만 근래에 들어 다소 질적으로 변화된 듯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첫째, '우리 민족의 구성원은 누구인가'에 대해 모호하게 표류하고 있다.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위한 80년대 말의 논의는 민족과 국가체제를 동일시하지 않고 국가체제는 다르더라도 민족은 하나라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그러기에 남북으로 갈린 두 국가체제의 국민은 물론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 해외동포들도 민족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원초적 민족감정을 재확인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국가를 기본단위로 한 국제법이나 국적법에 의거한 '국민'과 민족공동체 '구성원'의 관계를 분명히 정의하지 못한 혼란 속에서 심각한 시련을 겪고 있다. '동포는 누구인가'에 대한 진지한 국민적 논의가 아쉬운 때다.

*** 통일 시기 비관할 필요는 없어

둘째, '통일은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해 과거의 열기에서 벗어난 소극적인 기류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80년대 말에는 88올림픽이나 독일 통일 등이 통일에 대한 과도한 낙관론을 부추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냉전이 끝나고 우리가 러시아.중국.베트남 등과 긴밀한 관계를 날로 증대시키는 이 마당에 민족통일에 대한 비관론에 휩싸일 필요는 없다. 예컨대 수도 이전을 위한 논의의 경우 20~30년 안에 통일이 되겠느냐는 회의를 근거로 통일 이후는 염두에 두지 않고 지금의 인구과밀 해소나 지방분권만을 목적으로 이전을 추진한다면 확실히 재고해야 할 문제다. 그러기에 통일 추진세력 및 단체들로부터 수도 이전에 대한 의사 표시가 확실하지 않은 점은 다소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라가 어려운 고비를 넘을 때일수록 민주주의의 제도화를 후퇴시키거나 민족통일로 향한 믿음을 흔드는 경거망동을 정치인은 자제하고 국민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홍구 중앙일보 상임고문.前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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