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엔 중노동… 밤엔 “노리개”/생존자들이 증언하는「지옥의 정신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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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이름대신 번호로 불리며 밤새 시달려/먹을 것 제대로 안줘 생미나리 뜯어야/해방후 과거숨겨 살다 자살한 사람도
잇따라 밝혀지고 있는 정신대의 실상이 사회적인 파장을 크게 불러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정신대에 강제동원돼 참담한 경험을 했던 사람들이 속속 증언에 나서고 있다.
모두 20여만명으로 추산되는 정신대는 크게 군수물자공장에 동원돼 강제노역을 했던 「근로정신대」와 최전선에서 일본군의 노리개가 됐던 「종군위안부」로 구분된다.
○노청자씨
15일 오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사무실에서 당시 참혹했던 생활을 폭로한 노청자씨(72·충남 대천시)는 이중에서도 가장 비참했던 「종군위안부」.
노씨는 17세때인 37년 대전부근의 한 고개를 지나다 헌병들에게 납치되다시피 끌려가 3년간의 위안부생활을 시작하게 됐다고 증언하고 있다.
『짐짝처럼 지붕도 없는 화물열차에 실려 사흘동안 밤에만 이동하여 도착한 곳이 이름도 모르는 중국남부 한 도시의 일본군 부대였어요.』
노씨는 『마구간과도 같은 허름한 창고에 얼기설기 만들어놓은 방에서 40여명은 내 또래 조선처녀들과 함께 생활하게 됐는데 부대성곽밖으로는 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고 항상 군인들이 따라다녀 도망이라곤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당시 생활을 회상했다.
당시 이들의 생활은 일본군인들이 「공중변소」라 부를 정도로 치욕적이었으며,아침 10시부터 자정무렵까지 20∼30명에서 많게는 40∼50명까지 상대하며 휴식없는 고통의 연속이었다는 것.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꾐에 넘어가 주인집딸대신 징용을 자처했다가 중국 길림성 부근에서 1년여간 종군위안부로 있었던 황금주씨(70·서울 신림동)는 『술에 취한 채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말을 지껄이며 달려드는 군인들에게 매를 맞지 않기 위해서라도 가만히 있어야만 했다』며 『나중에는 사람이 모자라자 사할린까지 끌려가 위안부생활을 하기도 했다』고 당시 참상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노씨도 『3년동안 한번도 돈같은 것은 받아본 적이 없었으며 이름대신 번호로만 불려 누가 누군지도 모른채 지내야만 했었다』며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근로보국」의 기치아래 군수공장등에 강제징용됐던 「근로정신대」의 여성들 역시 참담한 생활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양춘희씨
서울 덕수고등소학교에 다니다 14세때인 44년 근로정신대에 차출돼 일본 부산현에 있는 항공기 부품공장에서 일했던 양춘희씨(61·서울 행당1동)는 『일요일도 없이 매일 4시30분에 일어나 하루 평균 14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렸었다』며 『월급은 고사하고 먹을 것이 부족해 공장담을 넘어 야생미나리를 뜯어와 먹기도 했었다』고 말했다.
가족들에게까지 과거를 숨긴 채 심지어는 이름까지 바꿔가며 남모르게 살아가거나 가슴속에 한을 묻어둔 채 자살한 사람들도 부지기수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결혼은 생각지도 못한 채 생활보호대상자로 아직까지 단칸방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 노씨등은 『더이상 우리와 같은 희생자들이 나오지 않기 위해서라도 진상규명과 공식사과·배상 등은 꼭 이뤄져야 한다』며 회한어린 목소리로 힘주어 말했다.<홍병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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