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공산당과 대결 「첫 승리자」/옐친 그는 누구인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느슨한 개혁에 불만 고르비에 등돌려
보리스 옐친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연방 대통령이 공식 사임함에 따라 11개 공화국으로 구성된 새로운 독립국가공동체의 실질적 최고 지도자로서 세계무대에 정식 진출하게 됐다. 옐친 대통령은 소련땅에서 공산당과 대결,승리를 거둔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지난 7월 러시아공화국 최초의 민선대통령에 취임한 후 공산당과 철저한 투쟁을 시작했다.
그는 8월19일 고르바초프 축출 쿠데타에 가담한 모든 군인들과 비밀경찰 KGB(국가보안위원회) 요원들에게 대열을 이탈하라고 촉구하면서 자신은 러시아공화국에 대한 통제를 계속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60세의 옐친은 수십년간 계속된 공산당의 권력독점에 염증을 느낀 유권자들의 분위기에 힘입어 구소련에서 가장 인기있는 정치인이 되었다.
그는 고르바초프 다음으로 서방에서 인기있는 구소련 지도자이기도 하다.
고르바초프와 옐친간의 미묘한 애증관계는 과거 수년간 소련 정치의 중심관심사였다.
한때 정치적으로 고르바초프의 보호를 받았던 옐친은 91년 2월 고르바초프의 최대정적으로 변신,그의 사임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난 4월 두사람은 일종의 공동전선을 구성,민주적이고 시장경제지향적인 새로운 소련을 건설하는데 힘을 모아왔다.
그러나 옐친은 현상 유지적인 소연방의 재편만으로는 난마와 같은 현 위기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같은 슬라브계 공화국인 우크라이나 및 벨로루시와 손을 잡고 지난 21일 알마아타선언으로 혁신적인 새 연합체인 독립국가공동체를 결성하는데 성공했다.
한때 건축 기사였던 옐친은 서부 시베리아 도시 예카테린부르크(구스베르들로프스크)에서 공산당원으로 일하던 시절부터 당의 권위에 도전한 경력이 있다.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 추진을 위한 심복으로 옐친을 85년 모스크바로 데려온 후 그는 급속도로 지위를 높여 정치국의 소장 멤버가 되었고 농업분야의 총책임자로 승진되었다.
그는 개혁의 속도를 가속화할 것을 끈질기게 요구,고르바초프로부터 배척받아 지난 87년 모스크바시 당위원장직에서 해임되었다.
90년 7월 그는 다시 도박에 나서 공산당을 탈당했다.
많은 진보파들이 공산당 탈당에 주저하는 가운데 그가 보인 과감한 행동은 국민들의 높은 인기를 얻었다. 그는 91년 6월 러시아공화국 최초의 민선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옐친은 지난 1931년 2월1일 우랄산맥의 한 농가에서 출생했다. 그는 우랄공과대학에서 공부했으며 55년 건설기술자로 졸업했다. 그는 61년 공산당에 입당,67년부터 85년까지 지방당에서 일했고 81년 중앙위 위원으로 승진했다. 그는 부인 나야와 딸 둘,손자 셋을 두고 있다.<모스크바 로이터="연합">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