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에 멍드는 동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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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녀석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렇잖아도 평소보다 한시간이나 늦어 아이의 귀가를 걱정하고 있었는데 눈까지 벌겋게 되어 돌아온 녀석을 보니 가슴이 철렁내려 앉았다.
『준아, 왜그래.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니.』채 신발도 벗지 않은 녀석을 마주보며 물어봤지만 아이는 아무 반응이 없다.
『무슨 일이 있었냐니까. 친구랑 싸웠어.』 이번엔 소리를 버럭 지르며 물어보았으나 역시 묵묵부답.
『괜찮아.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야단치지 않을테니까 말부터 해봐.』난 방금전과는 달리 낮은 소리로 차근차근 되물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제서야 모기만한 소리로 말문을 연 아이는 이내 닭동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는 것이었다.
난 확실한 대답을 듣기 위해 재차 되물어야했다. 『집으로 오는데요, 슈퍼 옆공터에서 어떤 형이 돈을 있는대로 내놓으라면서 다리를 차고 가슴을 때렸어요.』 『어머머머 세상에, 그래 돈을 줬어.』 『아침에 준비물 사고 남은 돈 400원을 줬어요.』 난 화가 치밀었지만 일단 큰 상처가 아니라는 것에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일전에도 이와 유사한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 나이가 꽤 든 한 학생(?)이 11세짜리 아들아이의 돈을 뺏고 엄마한테 이 사실을 말하면 그땐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혹시 있을지 모를 보복이 두려워. 엄마에게조차 말하지 않으려하는 무서운 세상이 그저 안타깝고 속이 탈뿐이었다.
하지만 더욱 답답한 것은 분노에 떨고 있는 부모인 나로서도 그럴 땐 어떻게 하라고 딱 부러지게 말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저 돈 달라고 하면 있는대로 다 줘버리고 때리면 무조건 맞으라고 해야 옳은 것인지, 아니면 너도 같이 때리라고 해야 하는지…·.
『남자가 돼 갖고 그까짓일로 울고 그래. 아마도 형도 반성하고 있을거야.』 어느새 아이는 그 일을 잊었는지 팽이를 들고 쏜살같이 대문을 박차고 나갔다.<서울관악구신림 9동1554의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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