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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김일성 오른쪽 앉혀 낙점암시/45년만에 밝혀진 북한 비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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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평양에 군용기 보내 김·박헌영 불러/“박은 지명도 낮다” 판단 탈락/“차기후보” 주위 위로에 박 불만없이 소에 수긍/면접뒤 연안파 합당등 김 체제 확립
【모스크바=김국후특파원】 『북한의 현대사는 스탈린 대원수가 평양의 김일성과 서울의 박헌영을 비밀리에 모스크바로 불러 처음으로 면접한후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지명했던 사실을 기점으로 새로운 조명이 필요합니다.』
해방후 북한의 공산정권 창출과정에서 주역을 맡았던 전평양주둔 소련군 제25군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은 『그러나 이 중대한 역사적 사실이 지금까지 묻혀 오고 있는 것은 「절대 비밀」이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90회생일(12월3일)을 한달여 앞두고 11월초 모스크바 근교에 있는 그의 아파트를 방문한 기자가 『이제 통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북한의 현대사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끈질기게 설득하자 그는 「절대비밀」에 대해 45년만에 입을 열기 시작했다. 한소수교와 남북관계의 개선등 새로운 역사적 환경이 그에게 증언을 결심토록 한 것 같다.
다음은 레베데프장군의 회고.
1946년 7월말이었다. 당시 북한에서는 소미공동위원회가 중단되면서부터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주관으로 「민주개혁」이 발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중국에 출장갔던 제1극동방면군 사령관 메레스코프 원수로부터 「오늘밤 평양에 갈테니 대기하라. 절대비밀이다」라는 전문이 날아 왔다.
나는 양복차림(정치장교는 평상시 사복차림)으로 25군민정사령관 로마넨코 소장과 함께 공항에 마중나갔다.
더글러스라는 기종의 특별군용수송기 한대가 활주로에 기착해 있었다.
우리는 기내에 들어가 메레스코프 원수를 맞았다.
그는 「스탈린 대원수가 김일성과 박헌영을 면접하겠다는 지시가 떨어졌다」며 「장군은 지금 나와 함께 모스크바로 가자」고 명령했다
그러나 나는 군복차림이 아니어서 곤란하다고 거절했다.
그러자 메레스코프 원수는 「시간이 없다」며 옆에 있던 로마넨코 장군에게 모스크바 동행을 요구했다.
잠시후 도착한 김일성과 그의 비서 문일,그리고 서울주재 소련영사관 부영사 샤브신과 박헌영,박의 비서등 6명을 태우고 모스크바로 직행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서울에 있던 박헌영은 샤브신의 주선으로 비밀리에 해주를 거쳐 평양에 와 대기하고 있었다.
박헌영을 북한의 지도자로 추천한 사람은 국방성 및 외무성계통(정보기관 소속)의 평양주재 정치고문 발라사노프,샤브신측이었다.
스탈린 대원수의 김·박 면접 자리에 책임자로 배석했던 제1극동방면군 군사위원 스티코프와 로마넨코 장군은 평양으로 돌아와 나에게 당시의 상황과 배경 등을 상세히 전해줬다.
스티코프 장군은 연해주에서 당중앙으로부터 모스크바로 급히 올라 오라는 지시를 받고 즉시 모스크바로 직행,그곳에서 김일성과 박헌영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면접장소는 모스크바 크렘린궁내 소련국가원수 및 공산당총서기 집무실.
스탈린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김일성,왼쪽에 박헌영이,그 정면 중앙에 스티코프 장군,그리고 좌우에 평양측의 로마넨코 장군과 서울측의 샤브신 등이 앉았다.
김의 비서 문일과 박의 비서는 각각 김·박뒤 보조의자에 앉았다.
스티코프는 의전에 까다로운 크렘린궁의 좌석 배치를 보고 궁내의 분위기를 쉽게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김일성을 스탈린의 오른쪽(소련에선 우측이 상석)에 앉힌 점이었다.
스티코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탈린에게 김일성과 박헌영을 차례로 소개했다.
스티코프와 로마넨코 장군은 제1단계 의전 결과에 따라 스탈린의 의중에 김일성을 북한정권의 지도자로 낙점하고 있음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이어 김일성과 박헌영의 간단한 북남한 정세보고가 있었다.
이를 듣고만 있던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소련군정의 협력을 받아 북한의 소비예트화 정책을 조기 실현시키도록 투쟁하라」고 지시했고,박헌영에게는 「어려운 여건속에서 분투하는 그대의 혁명투쟁을 높이 평가한다」고 격려했다.
이날밤 스탈린은 모스크바 근교에 있는 소련공산당 총서기 전용별장으로 김·박 일행을 초청,연회를 베풀고 「박헌영을 모스크바에 며칠 머무르게해 기업소·공장 등을 견학시키라」고 공산당간부들에게 지시하기도 했다.
스탈린이 이 두 사람에게 던진 두 마디는 소련군 정치지도자나 샤브신 등에게 매우 깊이 있게 받아들여졌다.
즉 김일성에게 지시한 소비예트화 정책은 토지개혁,8시간 노동제,산업국유화 등을 가리키며 이를 조기 실현시키라는 명령은 그를 북한정권의 지도자로 지명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우리는 스탈린이 김일성을 북한정권의 지도자로 지명한 것은 ▲김일성이 41년부터 45년까지 소련군에서 복무,소련의 명령에 충실해 그를 믿을 수 있었으며 ▲그는 스탈린이 싫어하는 코민테른(국제공산당)활동전력이 없는데다 다른 종파에도 관여하지 않았으며 ▲특히 그의 이름(본명은 김성주였지만­)이 북한인민들에게 「항일투쟁민족영웅」으로 널리 알려져 지도자로 부상시키기에 용이했고 ▲학식과 정치적 이론은 갖추지 못했으나 정치적 소질과 신념이 강한 빨찌산 출신청년인데다 소련에 충성할 것을 약속했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물론 스탈린의 이같은 김일성지명이유는 우리 군정 지도부가 그를 추천한 사유들이었다.
아울러 스탈린이 박헌영을 지명하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이론적으로 준비된 인텔리였으나 코민테른에 깊이 관여했고 ▲1928년 종파싸움으로 해체된 조선공산당원으로 종파활동(화요파)경험이 많았으며 ▲일제하에서 항일투쟁으로 세차례 10년동안 형무소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일본에 항복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북한 대중들에게는 박헌영이란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이렇게 하여 우리 군정 지도부는 스탈린이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최종 지명한 이후부터 북한의 「민주화 개혁」을 속도있게 진행시켜 나갔다.
즉 1946년 8월28일 연안파의 지도자 김두봉이 이끄는 신민당과 김일성의 조선공산당을 합당시켜 북조선 노동당을 만들게 하는 것 등이었다.
레베데프의 이같은 증언을 뒷받침하는 또한가지 중요한 증언이 있다.
스탈린의 김·박비밀면접에 대해 박헌영의 추천자중 한사람이었던 샤브신부영사의 부인이자 서울주재 소련영사관 도서관장이었던 샤브신 쿨리코아 박사(86·모스크바거주·전소련 과학아카데미 동방학연구소선임연구위원)는 『남편이 해방직후부터 박헌영과 여운형을 비밀리에 만나 남한정세를 논의했으며 46년 7월말 서울에서 미군정의 눈길을 피해 박헌영을 해주를 경유,평양공항까지 데리고 가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스탈린 면접에 배석했었다』며 『그러나 이는 「절대 비밀」이었다』고 레베데프장군의 증언을 뒷받침했다.
쿨리코아 박사는 『박헌영이 스탈린 면접에서 지도자로 지명받지 못했지만 차기 대권후보라는 주위의 위로를 받고 실망하지 않은채 불평없이 소련의 지시에 충실히 복종한 공산주의자였다』고 회고했다.
또 모스크바에 살고 있는 박헌영의 딸 박비바안나씨(63·무용가·국립무용학교 교수)는 『46년 7월말 모스크바시내 중심가에 있는 룩스라는 최고급호텔(현재는 호텔이 아님)에서 생후 처음으로 아버지를 만났으며 3일동안 아버지와 함께 기업소·공장 등을 견학하기도 했었다』며 『그러나 아버지가 왜 모스크바에 왔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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