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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분규 자극" 21곳 가위질|『구로아리랑』심의 파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박종원 감독(33)은 한양대 영화과 출신으로 85년 영화진흥공사 부설 한국영화아카데미 1기 수석 졸업자다.
그는 86, 87년 이두용 감독 밑에서 『내시』등을 조감독했다. 말하자면 박종원은 영화연출이란 목표 하나에 매달려 20대의 10년을 모두 투자한 셈이다.
영화계는 이 재능 있는 젊은 영화인에게 큰 기대를 걸었고 그는 88년 마침내 꿈에 그리던 첫 메가폰을 잡았다.
이문열씨의 단편 『구로아리랑』을 원안으로 해 동명의 영화로 데뷔한 것이다.
구로공단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삶을 중심으로 노동현장의 세계를 그려본 이 영화에서 그러나 박종원은 참담한 좌절을 맛봐야 했다.
6개월에 걸친 작업 끝에 완성된 이 영화가 공연윤리위원회 심의에서 무려 21군데나 잘려 나간 것이다.
이중 11군데는 공륜에서 감독 입회 아래 자진 삭제 형식을 취했다.
데뷔작에서, 그것도 기획단계부터 치면 1년 2개월이나 매달린 영화가 불구가 돼버렸으니 당시 그의 참혹한 심정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당시는 공윤의 심의가 상당히 완화된 상태여서 영화인들도 의욕이 대단했던 시절이었는데 이 느닷없는 강경 심의에 영화계는 적잖이 놀랐고 이 문제는 바로 파동으로 이어졌다.
한국영화감독협회(회장 권영순)는 「구로아리랑」검열탄압비상대책위」를 구성하고 곽종원 공윤위원장을 고발키로 하는 등 강경하게 나왔다.
감독협회는 성명서를 통해 『삭제된 21군데 장면은 이미 TV드라마·연극·문학 등 타 분야에서 수없이 다뤄진 내용들이며 표현 강도에 있어서도 TV드라마 등이 더 직접적이고 자극적인데 유독 영화에만 가위질한 것은 전체 영화인의 자율민주의식에 대한 모독』이라고 주장했다.
감독협회는 또 ▲공윤의 심의위헌여부 심판제소 ▲공윤을 영화윤리위원회로 대체키 위한 영화진흥법 제정 촉구 등을 내용으로 한 결의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박 감독은 요즘 『구로아리랑』을 다시 공윤심의에 올린다면 결코 그때처럼 잘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당시엔 대우조선의 파업 등 노사분규가 계속되고 있던 때여서 공윤이 이 영화 내용이 노사분규 문제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겁먹지 않았느냐는 게 그의 생각이다. 『구로아리랑』의 화면삭제·단축, 그리고 대사삭제 장면 등은 이렇다.
양품점 운영이 꿈인 억척스런 성격의 여공이 부자집 아들(그는 인생경험을 쌓기 위해 잠시 「위장취업」했고 여공은 그런 사실을 모른다)과 만나 동거하다 버림받고 낙담한 상태에서 실족사 하자 동료 여공이 『친구의 죽음은 부자놈 때문에 그런 거야』라고 내뱉는 대사가 삭제됐다.
공윤은 이 대사가 계층간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잘랐는데 이 내용은 박완서씨의 단편 『도둑맞은 가난』에서 따와 영화에 넣은 것이다.
또 작업반장이 술집에서 여공의 몸을 더듬는 장면은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잘렸고 『가장 피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농민들이 가장 가난하게 살수밖에 없는 이 현실이 문제야』라는 대사도 계급투쟁의식을 심을 수 있다는 이유로 삭제됐다.
그리고 노해의 시 『손무덤』을 낭독하는 장면, 노동자가 된 주인공이 과거 대학생활을 회상하는 장면, 사장 아들인 상무가 탁자 위에 발을 얹어놓고 거만한 표정으로 직원들을 보는 장면 등도 모두 잘렸다.
마지막 장면인 여공들이 장례행진을 강행하다 전경들의 진압에 부닥쳐 들고 있던 영정이 땅에 떨어지면서 군화 발에 깨지는 모습도 물론 삭제됐다.
이렇게 해서 모두 21군데가 삭제돼 영화는 만신창이가 돼버렸다.
『구로아리랑』심의를 앞두고 공윤은 영화 자체를 제작사에 반려하는 조치를 할 것이냐, 아니면 가위질하고 심의필을 할 것이냐를 놓고 고민하다 가위질 쪽을 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구로아리랑』은 극장 개봉 40시간을 앞두고서야 심의를 마칠 수 있었다.
6월 초에 심의 접수한 것이 한달 가까이나 걸려 검열했으니 공윤의 고민을 읽게 하는 대목이다.
보통 영화는 개봉 10일쯤을 앞두고 심의가 끝나는 것이 통례다.
영화평론가 김종원씨는 당시 『구로아리랑』문제에 대해 『영화소재 제한을 없앤다 해놓고 사회비판 영화는 계속 억제하면 퇴폐영화만 조장하고 보호받는 엉뚱한 결과만 가져온다』고 공문의 경직성을 비판했다.
김씨는 또 『영화의 사회비판을 체제 도전으로 인식하는 관행이 남아있는 한 한국영화의 홀로서기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영화진흥의 첫 걸음은 타율이 아닌 영화인들의 자율에 맡겨둘 때 시작될 것』이라고 영화인 편을 들었다.
박 감독은 『구로아리랑』을 체제비판영화로 보는 시각 자체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신은 이 영화를 사람은 각자의 출신·직업·학력 등 사회적인 조건을 떠나 인간이란 이름 아래 평등해야 한다는데 메시지를 둔 사회드라마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 영화에 대해 체제도전 운운한다면 도대체 어떤 영화가 가능하겠느냐는 주장이다. 『구로아리랑』 이후 관에 대해 수세일 수밖에 없는 영화인들은 사회성 영화제작 의욕이 상당히 위축된 것으로 나타났다.
단적인 예가 『붉은 방』제작 중단.
88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임철우의 소설을 장선우 감독이 영화화하기로 하고 헌팅 등 7천만원의 제작비를 이미 쓴 상태에서 『붉은 방』은 제작사의 제작 보류 결정으로 끝내 영화화되지 못했다.
운동권 수배인물을 숨겨준 혐의로 경찰에 끌려가 고문당하는 한 증권회사 직원의 수난과 고문 경찰관의 내면심리를 그린 이 소설은 영화화 제작신고 때 당시 문공부에 관례에 따라 2권의 시나리오를 제출했는데 이례적으로 5권을 더 요구, 이를 읽어본 경찰 등 기관에서 내용수정 또는 제작에 대해 은근히 압력을 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감독은 『영화는 관객이 각자의 판단에 따라 수용하는 작품이지 관이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예술행위』라고 말하고 『만일 소설가에게 소설의 내용을 문제삼아 관이 뜯어고친다면 소설가가 가만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박 감독은 요즘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연출에 열중이다. <이헌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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