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칼럼

새 공동체 이념이 필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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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정치이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이번 기회에 '보수'와 '진보' 등 자주 사용되는 용어가 한국적 특수 상황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있으며 세계적 흐름과 달리 어떤 특성이 있는지 되짚어 보는 것은 한국 정치발전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보수와 진보가 지닌 원초적 의미를 오해하거나 왜곡하는 관행을 시정해야 한다. 원래 'conserve'는 '보존(保存)' '보전(保全)' '보호(保護)'로 번역되어야 하며, 'conservative'는 자연보호처럼 국가나 사회의 기본가치와 틀을 보전하는 데 진력하겠다는 의미로서 구시대의 가치와 기존이익을 무작정 수호하겠다는 수구(守舊)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즉 필요한 개혁에 대해 교조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 아닌 것이다.

한편 진보란 시대의 변화와 사회적 개혁의 필요에 적극적으로 부응하는 진취적 개혁세력을 자처하는 입장으로 전통과 관행 및 기존의 제도를 통째로 부인하는 혁명세력은 결코 아니다. 블레어 총리가 이끄는 영국 노동당과 같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진보적이지만 혁명과는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다. 보수와 진보를 이처럼 온건한 이념집단으로 이해한다면 그들은 사생결단의 충돌보다 국민의 선택을 위하여 경쟁하는 건전한 맞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한국 정치에서는 보수와 진보를 표방하는 정치세력 간의 극렬한 대결만이 일상화되고 있는가.

한국 정치이념의 기형화(畸形化)는 아마도 62년째로 접어든 남북 분단의 특수성과 그러한 역경 속에서 추진된 민주화 및 산업화의 성공 대가(代價)가 뒤섞여 빚어낸 결과인지도 모른다. '민족'을 지상(至上)가치로 내세우는 민족주의는 대체로 보수 또는 우익의 이데올로기인 것이 통례이다. 사실 우리의 해방 정국이나 건국 초기에는 보수적 우파가 스스로를 '민족 진영'이라 자칭하고 국제 공산주의 세력과 대결하였다. 그와 반대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진보적 좌파를 가장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것은 바로 '인터나쇼날'과 붉은 깃발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한국의 진보세력은 '우리끼리'의 배타적 민족주의를 지상가치로 채택하였고, 보수세력은 세계화의 물결에 적극적으로 편승하는 개방적 국제주의 정책을 주도하게 되었다. 남북관계에서도 마땅히 진보세력이 외쳐야 할 반핵.반독재.인권옹호의 깃발이 보수세력의 손으로 넘어간 것도 한국 정치의 기형화를 확연히 반영하고 있다.

그러한 한국 정치의 기형화는 '통일'에 대한 일부 진보세력의 신앙적인 교조성에서 비롯되고 있다. 한국인은 누구나 통일을 원하고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외면하고 본인들만이 통일세력이고 그 밖에는 반통일세력이라고 규정하는 독선으로 '우리가 통일을 위하여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회피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대다수 국민에게는 통일은 중요한 목표이지만 평화와 자유를 희생할 수 없다는 것이 일반화된 합의다. 그러기에 독선과 독점을 넘어선 공동체의 이념이 개발되고 내실화되는 것이 시급하다 하겠다.

이른바 보수세력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지탱할 공동체의 이념과 정책을 추진하는 데 무성의하였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민주화에는 성공했지만 권위주의 체제가 남긴 상처와 후유증은 어떻게 치유할 것이며 산업화가 수반하고 심화한 빈부격차는 어떻게 해결할 것이라는 청사진이 없는, 즉 공동체의 이념이 결여된 보수는 중도주의를 포함한 어떤 이념적 기교로도 나라의 밝은 미래를 보장하지 못할 것이다.

이홍구 본사 고문·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