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 상실의 시대」를 생각한다(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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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이틀 간격으로 벌어진 대구의 나이트클럽 방화사건과 여의도의 자동차 폭주 살인사건은 우리가 어떤 시대,어떤 사회를 살고 있는지를 새삼 일깨워준 암울한 사건이었다.
18명이 애꿎게 목숨을 잃고 20여명이 크게 다친 이 두개의 사건을 우리 자신이 당한 것처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까닭은 똑같은,혹은 비슷한 유형의 사건이 다시금 재발할 가능성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우선 두개의 사건이 안고 있는 몇개의 공통점이 그와 같은 우려를 말끔하게 씻어주지 못하고 있다.
첫째는 두 사건의 범인이 똑같은 20대의 소외계층이라는 점이다. 아마도 같은 입장의 많은 사람들은 이 시대가 적어도 자신들에게는 「희망없는 시대」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둘째는 두 사건 모두 똑같은 충동범죄로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겨냥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는 피해자가 어린이든 어른이든,인명피해가 열명이든 백명이든 안중에 없었던 것이다.
셋째는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그들에게는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개념이 상실돼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자동차 폭주살인의 범인이 「나혼자 죽기는 억울해 여러사람을 죽이고 죽으려 했다」고 태연하게 내뱉은 말은 이들의 사회에 대한 적개심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게 해준다.
이와 같은 배경을 지닌 이 두개의 사건은 이 시대가 「인간성 상실의 시대」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사회 어느분야든지 발전이 있으면 그 발전에 가리워진 그늘이 있게 마련이다,
발전의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발전이 폭이 넓으면 넓을수록 그 그늘의 음영은 더욱 짙게 마련이다. 더욱 짙으면서도 위축된 채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다는데 그들의 특성이 있다.
정치인들은 이만한 정치발전을 이룩한데 대해 자긍심을 느끼고 있는 듯 하고,경제인들은 한국 경제가 이제 선진국 대열에 끼어들 수 있게 됐음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그들은 눈에 보이는 발전에만 급급하고 만족해할 뿐 뒷전에 가리워진 채 그 발전을 남의 일 보듯하는 무수한 소외계층에 대해 얼마만큼의 관심을 보이고 있는지 묻고 싶다.
정치·경제발전의 뒷전에 숨어 열등감만 키워가고 있는 빈곤층·소외계층의 심리적 좌절을 어느 정도나마 극복하게 해줄 수 있는 정치·경제적 배려는 과연 기대할 수 없는 것인가. 그렇게 해주지 못하는 한 「인간성 상실의 시대」는 빈곤층·소외계층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 그 자체에도 해당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범죄 그 자체나 범인들을 두호하고자 하는 뜻은 추호도 없지만,생명의 존엄성이 마구 파괴되는 이 「인간성 상실의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함께 생각해 보자.
멋대로 죽이고 죽는 이 사회에서 정치발전·경제발전은 무슨 소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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