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질서는 사회환경 탓-이만재<카피라이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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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86, 88행사를 치르는 몇해 동안 우리의 귀를 멍멍하게 했던 범국민적 캠페인은 「질서를 지키자」는 것이었다. 이 땅에 찾아올 외국인들에게 우리의 무질서를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를테면 승강장 무질서, 교차로 끼어 들기, 병목 지역 혼잡상, 줄서기 무질서 등이 대표적인 지탄 대상이었다.
신문·방송에는 날마다 각계의 점잖은 명사들이 등장하여 저마다 자기가 보고 온 선진국 사람들의 여유를 예로 들면서 우리사회의 무질서 사례들을 꾸짖고, 그리고는 예외 없이 우리의「조급한 국민성」을 지적하여 비하하기를 버릇처럼 했던 것이다. 물론 나 자신을 포함하여 그런 꾸짖음을 듣고 내심 스스로 켕기지 않은 사람이 별반 없는지라 독자나 청취대중들은 찍소리도 못하고 속으로 곱씹어야 했었다.
올림픽이 끝난 후 한동안 잠잠하던 매스컴의 그 질서캠페인이 요즘 들어 또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날로 심각해지는 교통난에 대응키 위한 사명감에서이리라.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 으레 또 등장하곤 하는 그 점잖은 어른들이다. 선진국 사람들은 생활에 여유를 갖고 질서를 여차저차 잘 지키는데 우리 나라 사람들은 「국민성이 조급」해서 무질서가 여차저차 하니 실로 한심하다는 투의 진단들이다. 그리고 결론은 으레 국민 개개의 질서의식 각성요망으로 끝난다.
각성 요망이라니…. 물론 필요한 얘기다. 그러나 사회의 무질서를 개개의 탓으로만 돌려 민족성 자체를 비하하는 짓은 옳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온순한 곤충도 좁은 공간에 무리하게 다수를 수용해놓으면 성질이 거칠게 바뀐다는 학자들의 연구도 있거니와 천하의 선진국민이라 하더라도 만일 우리처럼 좁은 땅덩이, 우리와 같은 교통여건 가운데 5천만명쯤 한번만 가두어 놓는다면, 그래도 과연 저들이 생활에 여유를 갖고 그야말로 질서를 잘 지키는 선진국민일 것인가가 내게는 못내 궁금하기 때문이다. 질서나 여유는 사회환경과 제도를 합리적으로 개선해나감으로써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이지 그냥 입으로 국민성이나 탓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믿기로 우리네 민족성은 원래 은근과 끈기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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