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길」 우리말 살린 국무회의/노재현 정치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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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2일 오전 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에서 열린 정례 국무회의는 내무부가 제출한 도로교통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면서 낱말하나를 수정키로 결정했다.
문제의 단어는 「길어깨」(노견)로 국무회의는 이어령 문화부장관의 제의에 따라 이를 「갓길」로 고치기로 하고,내무·건설·문화부와 법제처 등 관련부처가 구체적 수정절차를 밟기로 한 것이다.
당초의 법안(56조 1항)에 표기돼있던 「길어깨」는 법안이 마련중이던 지난 여름·추석때도 용어가 적당한가의 여부로 한마당 논란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었다.
이날 회의에서 이장관은 「길어깨」 또는 「노견」이라는 용어가 영어의 「ROAD SHOULDER」를 글자그대로 노견이라고 직역한 일본어번역의 직수입판임을 지적한 뒤 『국어연구원에 연구를 맡긴 결과 「갓길」「곁길」「길섶」 등 세가지가 검토대상에 올랐으며,이중 「갓길」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결론이 나왔다』며 다른 국무위원들의 의견을 물었다.
국무회의의 법안심의과정에서 법률용어의 순화문제가 제기된 것 자체가 드문 일이거니와 다른 장관들도 이를 선뜻 좇아 「갓길」로 고치기로 동의했다니 더욱 뜻깊은 일이었다고 느껴진다.
「하자」니,「제척」이니 하는 일상생활과 동떨어진 용어가 언어생활 일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법률에 쓰여야 하는 물음은 굳이 프랑스의 국어순화정책을 들추지 않더라도 우리나라 국어학계나 교육계,일반국민 사이에서도 오래전부터 제기돼온 터였다.
문화부장관의 자문기구인 국립국어연구원의 안병희 원장은 이날 국무회의의 결정을 반기며 『일본·미국은 물론 중국도 「국가 어언문자공작위원회」를 총리 직속기구로 두는등 각국이 국어심의기구를 일반부처보다는 상급에 두어 권위와 강제력을 부여하고 있다』며 우리의 국어연구원이 문화부 직속인 탓에 다른 부처가 따돌릴 경우 별 도리가 없는데 대한 아쉬움을 은근히 나타냈다.
하지만 첫술에 배부르기를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2일의 국무회의같은 장면이 정부 각 부처로 조금씩 확산되었으면 하는 바람은 기자 뿐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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