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역할을 다시 생각한다/본지 창간 26돌을 맞아(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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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민주화 갈등과 진통의 3년여 세월속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는가.
창간 26주년을 맞는 중앙일보는 바로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해서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점을 분석하고 그 해결책을 찾는 실마리를 얻고자 한다.
무엇을 얻었는가. 폭압적 낡은 권위와 질서가 무너지고 민주화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얻었다. 1인 독재의 지배유형에서 벗어나 여론과 인권이 존중돼야 한다는 민주정치의 기본틀을 갈등과 혼돈속에서 체득했고 부족하나마 지자제 부활에 따른 풀뿌리 민주주의의 실현을 이루었다.
정부권력의 막강했던 통제력이 사라지고 기업과 언론,나아가 사회 각 분야에서 자율성이 제고되고 이 자율성이 사회의 새 질서,새 권위를 확립하는 기본 정신이라는 믿음이 조금씩 자리잡는 풍토가 조성되고 있다.
편향된 이념의 추종자들이 벌였던 과격시위와 무질서 폭력풍조는 민주화의 진통과 혼란을 가중시켰으나 여론에 떠밀려 서서히 퇴조하면서 동구와 소련의 민주화라는 시대분위기 속에서 민주화·산업화·국제화만이 이 시대를 주도할 가치관이고 목표임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이것이 민주화 과정속에서 우리가 체득한 소중한 재산이고 민주화의 긍정적 측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잃었는가. 민주화의 부정적 측면은 무엇인가.
낡은 권위체제는 무너졌지만 무너진 자리에 들어선 것은 새 질서,새 권위가 아니라 집단과 개인의 무분별한 욕구와 주장뿐이었다. 민주화 욕구를 수용하고 추진할 중심세력이 없어 집단의 욕구에 떠밀려 임시방편의 인기영합식 정책이 쏟아졌다. 임금을 올리라면 올렸고 집이 없다고 아우성치면 2백만호를 때려짓겠다는 정책을 세웠다.
정부의 정책이 지속성과 일관성을 상실하고 목표와 방향을 잃은 채 떠밀려 발표되고 어느날 흐지부지 사라져버리는 하루살이 정책으로 아까운 세월을 허송했다.
물가가 뛰고 국제수지가 더할나위 없이 악화된 지금에 이르기까지 누구 하나 책임질 사람이 없이 대통령은 각료를 질책하고,각료는 1년이 멀다하고 바뀌었으며,정부는 기업에,기업은 정부에 책임을 전가하고 있을 뿐이다. 이를 보고 국민들 마음속에는 불신과 체념이 가득찰 뿐이다.
야당의 통합이 이뤄졌다지만,시정잡배와 다를 바 없이 자신들의 이해와 대권욕에 사로잡혀 이합집산하는 정치인들에게 좌절하고 불신하기는 마찬가지다.
정치와 경제가 표류하고 사회질서와 기강이 해이해지고 힘들고 어려운 일을 기피하는 근로의식 부재의 풍조가 이 사회에 만연하고 있지만 이를 책임지고 이를 다잡아 나갈 중심세력이 없음을 개탄하고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없다.
낡은 질서가 무너지고 새 질서가 자리잡지 못한채 표류하면서 일체의 권위가 불신되고 매도되는 중심없는 사회를 지켜보면서,여론을 수렴하고 새 질서,새 권위의 창출을 위해 기여해야할 막중한 책임을 진 언론이 제 기능,제 역할을 다 했던가를 돌이켜 반성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정치지도자들이,기업들이 새 시대의 민주화 정착을 위해서 아무런 기여를 못했듯,우리 언론 또한 신뢰보다는 불신을 위해서 기여했고 새 질서,새 권위의 창출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인기영합의 여론에 떠밀려 보도하고 주장해 왔던 것이 아닌가 하는 회오와 깊은 자성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정부와 정치지도자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지탄에 못지않게 언론 또한 국민적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솔직이 시인하고 민주화 시대에 부응하는 언론의 위상정립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를 다시금 확인하고 천명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위해선 먼저 중심세력 없이 떠도는 이 사회의 혼란을 수습하고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보다 과감히 발언하고 보도해야할 언론본연의 자세에 더욱 충실해야 한다고 믿는다. 종래의 엉거주춤한 양비양시론에서 벗어나 새 권위,새 질서의 창출을 위해서 보다 명확하고 과감한 자세에서 감시하고 비판하는 역할에 충실할 것을 다짐한다.
개인과 집단의 이해에 골몰하거나 다중의 목소리나 과격시위에 겁먹고 움츠러드는 여론 편승의 자세가 아니라 시대적 요청과 목표에 따라 보도하고 주장하는 적극적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스스로 믿는다.
시대적 요청으로 부각된 민주화,산업화,그리고 국제화라는 세개의 축을 굳건히 세우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할 일을 제시하고 지혜를 짜내는데 앞장서는 것이 우리 언론이 당면한 초미의 과제라고 확신하고 그 역할에 충실할 것을 다짐한다.
창간 26주년을 맞는 중앙일보는 민주화 과정속에서 잃은 것보다는 얻은 것을 위해서,또 부정적인 측면을 해소하고 긍정적인 요소들을 극대화시키는 시대적 사명감에 충실할 것을 거듭 다짐하면서 독자 제현의 참여와 협조가 계속되기를 기대해 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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