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베르투슈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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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베르투슈카'는 러시아말로 전화의 다이얼을 의미한다. 하지만 요즘은 크렘린과 기업 간에 연결된 직통 핫라인을 '베르투슈카'라고 말한다.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1996년 대통령 재선운동 때 정치자금 모금과 여론 조성에 결정적 기여를 한 기업인들에게 크렘린과 연결된 핫라인을 개설해 주었는데 이게 베르투슈카의 시초다.

베르투슈카 이전에 러시아에서 질시와 선망의 대상이던 핫라인은 '크레믈료프카'였다. 하지만 이는 사(私)기업과 최고 권부를 잇는 용도가 아닌 공무용이었다. 국가기관의 장, 주요 국책연구소의 장, 혹은 권력 실세들의 집에 이런 크레믈료프카가 가설됐다. 지금도 그 사람의 실제 권력 위상을 알려면 책상 위에 어떤 등급의 '크레믈료프카'가 가설돼 있는지를 보면 된다.

소련 해체 후 새롭게 등장한 거대 기업인들은 크렘린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물적.인적 라인을 확보하려 열심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국가가 전체주의 체제에서 다원화된 민주체제로의 이행을 목표로 한다 해도 사기업에 크렘린 권부를 직접 연결하는 핫라인인 크레믈료프카를 확장.개통해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기업용 크레믈료프카'인 베르투슈카가 창안된 것이다.

베르투슈카를 확보한 기업들은 이 핫라인을 이용해 크렘린 내부와 직접 연결될 수 있었다. 베르투슈카는 기업에는 하나의 훈장이자, 방패였다. 눈에 잘 띄게 다이얼 중앙에 그려져 있는 '낫과 망치'는 이 책상의 주인이 '크렘린과 연결된' '크렘린이 관리하는' 혹은 '크렘린을 관리하는'특수한 영향력의 기업인임을 상징했다. 현재 러시아에서 베르투슈카를 확보한 회사는 모두 28개다.

그런데 최근 푸틴이 베르투슈카 라인의 단절을 지시했다. 크렘린은 보안성과 안정성을 점검하기 위해서라지만 러시아 재벌들은 이것이 '다시 연결될 수 있을지' '남들도 똑같은 시간에 단절됐는지'를 알아보느라 전전긍긍이다. 더군다나 푸틴의 조치가 러시아판 거대 재벌인 올리가키의 대표 격인 구신스키와 베레조프스키.호도르코프스키 등을 잇따라 구속하거나 탄압한 후 나온 것이어서 그들의 위기감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집권 후 일관되게 부패와의 전쟁, 강한 러시아의 부활, 올리가키의 정치 개입 불용을 주장하는 푸틴. 과연 그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김석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