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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이 실패해선 안 될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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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평생을 마이너리티(소수자)로 살아온 그였기에 대통령 당선은 더욱 극적이었다. 그가 '특권과 반칙이 없는 사회'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외쳤을 때 숨죽이며 살아왔던 서민들은 열광했다. 번듯한 학벌과 두터운 상류층 인맥,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자금 등 주류의 강점들은 빛이 바래는 듯했다. 정치적 경쟁자 가운데 한 명인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조차 "한나라당 소속이 아니었다면 나도 노무현 후보를 찍었을지 모른다"고 말했을 정도다.

노무현 대통령은 '가진 것 없고 빽 없는 사람'들의 희망 그 자체였다. 그 의미에선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과도 차이가 있었다. "이젠 대학 못 나오고, 돈 없는 사람들도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는 '증거'가 되기에 충분했다.

노무현 신화는 아이들에게도 교훈이었다. 부모는 자녀에게 "인생은 스스로 개척할 때 훨씬 값진 것이며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런 노무현은 지금 무능한 대통령, 실패한 대통령으로 낙인찍혀 있다. 적어도 다수의 평가는 그렇다. 그를 열렬히 지지했던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는 '노무현에게 사기당한 사람들의 모임'이란 자조 섞인 말까지 나오고 있다.

서민들은 이 정부 들어 더 살기 어려워졌다고 아우성이다. 부동산.교육정책은 잘못된 정책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고 있다. 안보에 대한 불안감은 노 대통령의 실패를 넘어 좌파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논란이 뜨겁다. 그래서 집권 4년차 성적표는 온통 낙제의 붉은 도장투성이다.

정책의 실패보다 심각한 문제는 '노무현의 실패=마이너리티의 실패'로 낙인찍히고 있는 점이다. "다음 대통령은 대학을 나오고, 경험이 있는 사람이 맡는 것이 적절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한 야당 의원의 말이 파란을 불렀지만 "그래 그 말이 맞아"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현실이 됐다. 학벌이나 인맥.재산이 진입 기준이 되는 사회로 돌아가는 조짐이 보이는 것이다.

노 대통령 자신이나 이 시기 국정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개인적 실패에 그치지 않고, 그에게 열광했고 그래서 한 표를 보태준 소리 없는 마이너리티의 실패로 귀착되고 있다. 노 대통령이 실패한 대통령이란 꼬리표를 단 채 막을 내려선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노 대통령은 25일 취임 4주년을 맞는다. 아직 그에겐 1년의 시간이 남아 있다. 임기말 1년에 뭘 할 수 있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상고 출신 대통령, 서민 대통령에 환호했던 사람들과 다시 눈높이를 맞춘다면 개헌(改憲)이 아니라도 할 일은 많다.

지금부터라도 서민의 눈물을 닦아줘야 한다. 386 참모들과 토론만 하지 말고 손님이 없어 휑한 재래시장으로, 늦은 밤 차디찬 도시락을 먹으며 졸음을 쫓는 수험생들로 가득한 입시학원으로 달려가보라. 장애우와 노숙자.치매노인.가출 청소년들처럼 사회의 무관심 속에 방치된 채 그늘 속에 살아가는 이들을 찾아보는 건 또 어떤가.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겠느냐"고 하지 말고 그들의 소리를 듣고 함께 눈물 흘려 보라. 당장 주머니를 채워주진 못해도 마음은 푸근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게 "민생 어려움을 만든 책임은 내게 없다. 전 정권에서 물려받았다"고 남의 탓을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그렇게 해야 "시행착오는 있었어도 상고 출신 대통령도 괜찮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노 대통령은 마이너리티와 비주류가 계속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그것이 자신을 뽑아준 유권자와 국민에게 마지막으로 보답하는 길이다.

이정민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