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의 정한에 뭉클한 감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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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소련 알마아타 국립조선극장 배우들이 세계한민족체전 연극제(13∼15일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보여준 『지옥의 종소리』는 출연자들의 진지한 열기가 유난히 감동석인 무대였다.
○…우리에게 「가시리」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설화 『설씨의 딸』을 극작가 연성용씨가 각색한 이 작품의 배경은 고구려·백제를 점령한 신라가 계속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던 시대의 산골마을 머슴 가실은 큰 바위(주검바위)를 캐내며 장차 밭을 일구고 집을 지으면 설랑과 결혼할 수 있으리란 기대에 부푼다.
징벙을 알리는 불안한 영문 종소리가 울려퍼지고 환갑노인 설랑의 아버지도 억울하게 수자리살이(국경을 지키는 군사살이)에 내몰리게 되자 가실이 대신 수자리로 떠날 것을 자청한다.
가실이 전쟁터로 떠난지 6년. 아무 소식이 없자 그 마을 한 부자는 설랑을 후처로 맞아들이려 횡포를 부리는데 눈이 멀고 병든 가실이 구사일생으로 돌아온다. 설랑의 앞날을 위해 가실은 설랑을 찾아가 「가실이 죽었다」고 알리고….
○…전쟁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평화에 대한 갈망을 담은 이 연극은 춤과 노래를 섞은 50년대 한국의 신파조가극을 연상시킨다. 지난 77년 이 극단에 발을 들여놓은 후에야 우리말을 배울 수 있었다는 한인 3세 배우 진표도르씨는 『소련의 고려인(한인교포)들은 이 연극을 보며 많이 운다』고 전하면서 『우리들의 말이 부족한 것을 잘아는 조국의 관객들 앞에서 공연하려니까 더 큰 책임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매끈하지 못한 대사보다 오랜 단절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정한수 떠놓고 간구하는 여인의 정한을 잘도 소화해내는 모습에 더욱 주목하며 대견함과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한 핏줄이라는 증거』라는 한국연출가 손진책씨의 이야기가 서울 관객들의 소감을 잘 대변했다.

<김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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