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분도 모르는 지방의원들(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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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일부 지방의회 의원들의 각종 저급비리에 이어 서울 양천구의회가 구청장 판공비를 몽땅 의원활동비로 나누어 쓴 것은 실망을 넘어 개탄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의원들이 추경삭감을 앞세워 의원활동비를 변칙책정토록 협박하고 이에 못이긴 구청장이 자신의 법정판공비를 내놓아 입막음을 했다니 이를 두고 분개하지 않을 주민이 있겠는가.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의 비리는 단순히 양천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경중의 차이는 있겠지만 전국 도처에 비슷한 불법요인이 잠복해 꿈틀거리고 있다고 한다.
지방의원들이 의장협의기구나 정당을 통해 내놓고 있는 요구중에는 본분을 망각한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판공비를 내놓으라는 것은 이미 문제가 됐지만 이것 말고도 「의장의 차를 그랜저로 사달라」「지방의원도 유급보좌관을 두게 해달라」「상임위를 늘리고 속기사와 사무직원을 증원해 달라」는 것등등…. 사실상 국회의원과 동등한 대우를 해달라는 요구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요구는 지방자치의 정신에 어긋날 뿐아니라 법에도 맞지 않는다. 우선 이들은 지방의회 의원을 무보수·명예직으로 규정한 관계법을 충분히 알고 또 그 법을 지키겠다는 전제하에 출마,당선된 사람들이다.
때문에 「무보수·명예직」에 어긋나는 일체의 요구는 선거구민의 자치정신을 배신한 것인 동시에 법을 어긴 행위다. 지방의원은 고액의 보수와 유급보좌진을 법적으로 보장받는 국회의원과는 근본적으로 신분과 권한이 다르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럼에도 감히 지방의원들이 분에 넘치는 처우를 요구하며 관을 협박할 수 있는 것은 예산심의권과 감사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금년만 해도 전국 지방의회가 다룰 예산규모가 10조원이나 되며 내용을 보면 주민 실생활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다.
한마디로 조목조목 이권개입의 소지가 있으며 마음만 먹으면 관청의 사업계획에 얼마든지 차질을 초래할 수 있다. 이번 양천구의 경우도 2억원의 의원판공비를 예산에 책정하지 않으면 추경 20억원을 깎겠다고 협박했던 것이다. 정부임명공무원인 구청장도 협박에 못이겨 자기 판공비 2천여만원을 포기했는데 앞으로 민선 자치단체장이 생기면 오죽 시달리겠는가.
물론 전국의 자치단체장이 모두 양천구청장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정도의 양식과 줏대를 가진 자가 구청장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니 우리의 공직풍토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는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지자제의 건전한 정착에는 무엇보다 지방의원들의 책임과 사명감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그들도 한국적 풍토에서 당선은 물론 의원직의 유지에 너무 돈이 많이 든다고 호소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무보수 명예직이 비현실적이어서 감당할 수 없다면 스스로 의원직을 포기하든지 아니면 정당한 절차를 밟아 법을 개정해야지 불법을 정당화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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