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날(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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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운문선사가 보름날 아침 제자들과 선문답을 했다. 삭망상당 법상에 올라앉은 운문은 좌하의 선승들에게 『15일 이전의 일은 묻지않겠으니 15일 이후에 대해 나름의 의견을 말해보라』는 질문을 던졌다. 수시에 대해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자가 없자 스스로 『날마다가 다 좋은 날』(일일시호일)이라고 답했다.
15일은 깨달음의 상징인 만월이 되는 날이다. 그러니까 깨달음 이전은 불문에 부치고 깨달음의 소식을 얻은 후의 영원한 미래에 대한 견해를 물어본 것이다.
운문이 말한 「좋은 날」이란 무명에서 벗어나 스스로가 시간의 주체가 되는 삶의 나날들이다. 그러한 시간은 물리적으로 구분한 연월일시와 같은 세속의 객관적 시간이 결코 아니다.
운문의 주체적이며 실존적인 시간,이러한 시간에서는 내가 시간의 흐름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과거와 미래가 전개된다. 그런 과거와 미래는 다같이 오늘속에 들어있으면서 텅빈 허공처럼 생동한다.
지난 21일 소련 쿠데타가 뒤집힌 직후 부시 미국 대통령이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시는 『오늘은 좋은 날이다. 정말로 좋은 날이다』고 환호했고 고르바초프는 『나는 드디어 복권됐다』고 화답했다.
대서특필로 보도된 두 초강대국 정상들의 이같은 위기상황속 통화내용도 어찌보면 평범한 세속감정에 불과하다. 부시가 두번씩이나 힘주어 강조한 「좋은 날」이란 환호성은 운문이 말한 「호일」과 똑같은 것은 아닐게다. 그러나 부시의 좋은 날에도 공산학정과 쿠데타같은 무명으로부터의 해탈쯤은 어렴풋이나마 염두에 두었음직하다.
일상의 평상심에서 우러나온 솔직하고 천진스런 표현이었다해도 좋다. 인간의 자성이란 원래 쿠테타같은 불의를 싫어하게 마련이니까.
소련에 「8월혁명」이라는 둥근달이 높이 떠오르고 있다.
철옹성의 공산당도 무너졌다. 세상사의 무상을 새삼 되씹게 한다. 그러나 단순한 이데올로기적 감정만으로 소련 제2혁명에 환호해선 안된다.
무상한 변화를 뛰어넘어 역사와 미래를 혜안으로 이끌어가는 삶의 나날만이 참으로 좋은 날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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