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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100쇄 본을 받아들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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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사람과 마찬가지로 책에도 삶이 있다. 사람의 태어남과 죽음이 기록된 호적에 해당하는 게 책에도 있다. 모든 책의 앞이나 뒤에 붙어 있는 판권이 그것이다. 사람의 호적과 다른 게 있다면 책의 판권에는 그 책이 죽은 날짜가 기록되지 않는다. 또 하나 더 있다. 사람이 새롭게 거듭나는 삶을 산다고 해서 그때마다 호적에 기록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책은 자신의 문제점을 고치거나 시대와 상황에 맞게 거듭날 때마다 그것이 기록으로 남는다. 1판.2판.3판은 한 권의 책이 얼마나 자주 새롭게 거듭났나를, 1쇄.2쇄.3쇄 등은 그 책이 얼마만큼 독자의 사랑을 꾸준히 받고 있나를 알려준다.

'아리랑' 1권의 판권을 펼쳐보니 1994년 6월에 처음 태어나 1판 70쇄, 2판 29쇄를 거쳐 2007년 3판 1쇄에 이르렀다. 글쓴이는 물론 책 만드는 사람이 가장 행복할 때는 책의 꾸준한 생명력을 확인할 때다. 얼마나 기뻤을까.

한 권도 아닌 12권짜리 대하역사 소설이 이토록 독자들의 사랑을 꾸준히 받고 있는 힘은 무엇일까. 글쓴이 조정래 선생은 4년8개월 만에 '아리랑'이라는 '글 감옥'에서 나오면서 이런 말을 했다. "…옛날이야기를 좋아하다 보니 당연히 사회생활 시간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6학년 때 사회 과목을 배우면서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36년 동안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모든 동포들이 일본 사람들에게 짓밟히며 수없이 죽고 고통을 당했다는데 책에 나오는 것은 고작 안중근 의사요, 유관순 누나에 33인 정도였다. 그럼 나머지 사람들은 다 무엇을 하고 당하고만 있었단 말인가? …." 그렇다. 과연 문자로 기록된 역사란 무엇일까. 한 시대만 놓고 보더라도 기록된 역사는 그중 얼마나 될까? 기록된 역사라 하더라도 그 속에 진실은 얼마만큼이나 담겨 있을까. 하물며 침략과 독재와 탄압의 시대에는 말해 무엇하랴.

"36년 동안 죽어간 우리 민족의 수가 400여만! 200자 원고지 2만 장을 쓴다 해도 내가 쓸 수 있는 글자 수는 얼마인가!" 이것은 글쓴이가 '아리랑'을 쓰는 내내 곱씹은 자신을 향한 경고문이었다고 한다. 글쓴이는 소설을 쓰기 전, 민족 수난과 투쟁의 현장들을 찾아 지구를 세 바퀴 이상 도는 발품을 팔았다. 억울하게 죽어간 수많은 이들의 사연과 한이, 역사로 기록되지 못한 숱한 이야기들이, 산 자들의 입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졌으리라. 그들 삶의 궤적 속에 화석처럼 박혀 있었으리라. 한 시대의 역사 기록, 기록보다 더 정확한 수많은 이야기들, 거기에 작가의 상상력과 통찰력을 버무리자 역사 속 진실들은 꿈틀거리며 일어났다. 문자의 힘과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의 힘이 부딪쳐 난 거대한 소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쓰러져 있던 한 시대의 역사를 일으켜 세웠다. 이것이야말로 이 책의 영원한 생명력이 아닐까.

10여 년 전, 나는 인생의 큰 파고 앞에서 이 소설의 초판을 읽으며 위로받았다. 그때 곳곳에 밑줄 긋고 메모해 가며 읽었던 책은 내 친구가 가져간 지 오래다. 그 후로도 책을 사서 책꽂이에 꽂아놓기만 하면 친구들이 가져가곤 했다. 이 책 역시 누군가 가져가기 전에 얼른 다시 한번 읽어야겠다. "초록빛으로 가득한 들녘 끝은 아슴하게 멀었다." 가슴이 떨린다.

강맑실 사계절출판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