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향기] 앉으나 서나 외손자 생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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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손자가 하나 있다. 그동안 30년 넘게 집안에 어린아이가 없다가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얻게 된 참으로 귀하고 사랑스러운 손자다.

이제 만 8개월을 넘긴 아이는 비온 뒤 죽순이 자라듯 무럭무럭 잘 자라주어서 가족들의 기쁨을 더하고 있다. 이미 손자를 본 친구들은 "외손자보다는 친손자가 내심 더 달다"고 하는데도 나는 시집간 딸이 낳은 이 아이에게 마음을 다 주어버려 어떻게 이보다 더 내 마음을 끌 아이가 있겠는가 싶을 정도다.

근래 들어 더 왕성히 움직이는 아이를 챙겨야 하는 딸의 고단함도 덜어줄 겸 우리 내외는 가까이 사는 딸 모자를 자주 집으로 불러들인다.

아내는 손자가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점심밥 차리는 것도 잊은 채 쭈그리고 앉아 아이를 넋을 잃고 바라보고, 나는 손자가 타고 놀 보행기 이음매의 거친 부분을 사포로 매만져가며 다듬어놓고 그 아이가 목욕할 물을 알맞은 온도로 데우면서 흥이 절로 나기도 한다. 저녁나절이 되어 이 모자가 제 집으로 가버리면 밤중에 자꾸 어린 것이 눈앞에 어른거려서 딸이 주고 간 아이의 사진을 돋보기를 쓰고 한참을 들여다본 적도 많다. 어린 것에게 그토록 마음이 헤퍼져버린 것이다.

아이의 어떤 행동은 조금 더디고 어떤 행동은 조금 이르고가 있을 뿐 월령에 얼추 들어맞는 발달상황을 보이는 것도 외할아버지가 보기에는 정녕 신통하다. 이 어린 것이 얼마 전에는 스스로 앉을 수 있게 되더니 지난주부터는 사물을 잡고 일어서는 연습을 맹렬히 하고 있다.

엄지발가락에 물집이 생기도록 방바닥을 비비고 다니기도 하고 무릎이 뻘게지도록 기기도 하더니 이젠 쓰러지고 또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기를 시도하는 게 옆에서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저렇게 열심히 하다니… 기특하고 대견해서 무릎이 꺾인 아이를 꼭 껴안아 주면 어린 것의 심장박동이 내 가슴에 그대로 전해져 온다.

그리고 땀으로 축축해진 손을 닦아주며 살펴보면 그 연하디 연한 아이의 손바닥에는 보랏빛 실핏줄이 내비치고 있다. 내 손자가 앞으로 겪어야 할 수많은 일들, 거쳐야 할 관문과 맞이해야 할 나날들이 그 가느다란 실핏줄에 보이는 것 같다.

봄에 태어난 내 손자가 여름과 가을을 건강하게 보냈고 생후 처음 맞이하는 이번 겨울도 아무 탈없이 보낼 것을 믿어마지 않는 것처럼, 앞으로도 수많은 계절을 모쪼록 강건하게 맞이했으면 한다.

환갑을 훌쩍 넘긴 이 할아버지가 새싹 같은 내 손자 아이에게 바라는 건, 더도 덜도 말고 건강하게 잘 자라주는 것이다. 참으로 두려운 마음으로 바라건대, 내 손자와 더불어 다른 사람들의 손자들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이 좀 맑고 밝은 환경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것은 단지 핏줄에 쏠려 있는 이기적인 한 할아버지의 생각만은 아닐 게다.

김영수 (서울시 노원구 상계8동.6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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