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joins.com] "까짓것, 부부 사이에 자존심 따위야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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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조인스 블로그는 고민 상담의 장으로도 활용된다. 박유향(42.사진)씨도 마음 넉넉한 고민상담가 중 한 명이다. 박씨는 얼마 전 블로그를 검색하다 "부부싸움, 이젠 정말 지겹다. 그만 하고 싶다"며 40대 남성이 올린 하소연을 봤다. 박씨는 자신의 블로그(blog.joins.com/durian0502)에 부부싸움에서 탈출하기 위한 나름의 해법을 제시했다. 박씨의 글과 네티즌 반응을 소개한다.

학창시절 우루루 몰려다니던 친구들이 있었다. 겉으로야 우정을 내세웠지만, 실은 대리 출석, 리포트 작성 분담,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했던 미팅 멤버 조직 등 다분히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목표로 뭉쳤던 친구들이다.

S는 그중 한 명이다. 자그마한 키에 가무잡잡한 피부, 예쁘장한 얼굴을 가졌던 그 친구는 어딘지 푼수 같은 면이 있어 종종 다른 친구들의 한숨을 자아내곤 했다.

그는 늘 용돈이 궁해 친구들과 카페에 가도 커피를 시키지 않았다. 미팅 나가서 상대가 찻값을 낼 것 같으면 재빨리 색깔도 요란스러운 '파르페'(당시로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게 럭셔리했던 메뉴)를 시켜 평소의 한을 풀곤 했다. 또 주변의 크고 작은 연애사에 참견해 별 도움도 안 되는 조언을 늘어놓는다든가 하는 식의 행동을 했다.

평소 "넌 회계사가 돼야 한다"는 아버지의 엄명을 들었던 S는 "사실 회계사가 뭐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두꺼운 회계학 책이 도서관에서 베고 자기엔 딱 좋다"며 학기 내내 회계학 책을 끼고 다녔다. 주책 맞고, 철딱서니 없어 보였던 그는 회계학 책을 엉뚱한 용도로 쓰는 바람에 회계사 시험에 응시도 못 해보고 집에서 빈둥거리는 처지가 됐다. 게다가 남의 연애사에 참견하고 다니느라 자신은 남자친구 하나 없는 다소 한심한 청춘이 됐다.

만약 S가 노처녀로 남으면 어떻게 될까? 친구들은 어쩐지 골치아플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녀의 스타일로 보아 상대해 주는 게 좀 피곤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급기야 친구들은 S의 짝을 만들어 주겠다고 열을 올렸고, 요행히 한 건이 성공해 결혼까지 이르렀다. S의 짝을 찾아준 친구에겐 "넌 앞으로 나쁜 일만 해도 천당 갈 것"이란 치사가 쏟아졌다. 친구들은 S가 과연 잘 살까, 남편한테 무시나 당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한동안 불안한 심정으로 S의 행적을 유심히 지켜봤다.

그런데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S의 결혼생활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그녀는 행복해 했다. 게다가 그녀답게 친구들을 만나면 남편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자신은 남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푼수처럼 떠드는 것이었다. 친구들은 처음엔 안도하고, 그러다 좀 한심해 하고, 나중엔 관심 없다며 S에 대한 걱정을 접었다.

당시 난 S의 결혼관에는 좀 다른 점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누군가 "(남편한테) 자존심 상하게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하니"라고 하면 S는 점잖게 "부부 사이에 자존심 같은 건 필요 없어"라고 중얼거렸다. 또 "그럴 때 여자가 지면 남자는 점점 더해"라고 하면 "일단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줘, 까짓것"이라고 대뜸 대범하게 말하는 것이다. 어딘지 미련하게 사는 것 같은데 그것이 바로 그녀의 '행복 비결'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도서관에서 회계학 책을 베고 누워서 도를 닦았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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