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있었던 『백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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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4학년 우리 반 친구 중에 유원성이라는 애가 있었는데 이 친구의 할아버지가 유명한 유대치의 아우였다.
1학년 때 어느 비 오는 날 기골이 강대하고 심하게 얽은 노인 한 분이 교실 뒷문을 드르륵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원성아, 우산 가져왔으니 이따가 쓰고 오너라.』
우렁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는 또 드르륵 문을 닫고 나갔다.
정강이까지 올라오는 짧은 두루마기를 입고 검정 갓에다 유지로 만든 각모와 투박한 나막신을 신고있었다. 그 양반이 쓰고 가는 우산도 한목 우산살이 부러진 낡은 것이었다. 그러나 나이 어린 내가 보기에도 그 양반의 태도에서 어떤 범하지 못할 위엄을 느꼈다.
나이 먹은 애들의 설명을 들어보니 그 양반이 유명한 백의정승 유대치의 아우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양반이 우리가 4학년 되던 해에 별세했다.
다른 애들은 유군의 할아버지가 별세한 것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변아무개라는 나이먹은 반장은 우리 반에서도 부의금을 모아 정중하게 문상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나도 4학년 대표들과 함께 변군의 선도로 초상집에 갔다.
변군은 상가에서 「위대한 선각자 유대치를 존경하는 것만큼 그 동생 되시는 분의 별세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내용이 담긴 추도문을 읽었다.
문상객으로 온 많은 사람들은 어린 학생들의 뜻이 참으로 갸륵하다고 칭찬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변군은 자기 집 한약방에 드나드는 사람들에게서 들었다며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유대치는 당시 정계막후에서 「백의정승」으로 불렸으며 김옥균·서광범·박영효등을 지도했고 격변하는 국제정세에 따라 문호개방과 정치혁신을 주장하였다. 비록 정사에서는 그를 크게 부각시키지 않고 있지만 그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필요할 때다. 『고종황제는 김옥균이 주도하는 갑신정변이 군주제를 없애고 대통령제 공화국으로 만들어 유대치를 대통령에 추대할 것을 목표로 하고있다는 소문을 그대로 믿고 김옥균을 능지처참까지 할 만큼 어둡고 의심이 많아서 마침내 나라를 일본한테 빼앗기게 된 것이다. 그때 유대치가 만일 잡혔더라면 그 또한 주모자로 능지처참되었을 것이고 유군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변군외에 또 한사람 한군이 있었다.
그는 대단한 문학청년으로 3학년 때 이미 안서 김억의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를 읽으며 다녔다.
안서 김억은 우리나라에서 내서(서양) 명작의 번역시집을 제일 먼저 발간한 시인으로 1921년 2월에 이 『오뇌의 무도』를 발간하였다.
4×6배 판으로 된 이 시집은 1920년에 설립된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출판한 것이었다.
나는 한시는 조금 배워서 알지만 국문으로 된 신시는 별로 읽은 일이 없었다. 그래서 한군이 읽는 서양시를 읽어보았지만 무슨 뜻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나보다 다섯 살 위인 한군은 『너희들이 뭘 안다고 그래』하며 멸시하는 것이었다.
이듬해인 1922년 정월에 문예잡지 『백조』가 창간되었다.
교동학교에서 조금 내려가다가 오른쪽으로 회색 칠한 집에 작은 간판 둘이 걸러있었는데 한 쪽이 백조사, 다른 한쪽은 흑조사이었다.
이 백조사에서 발간하는 잡지가 『백조』였는데 흑조사는 간판만 걸었을 뿐 끝끝내 간행물을 내지 않았다.
잡지 『백조』의 광고를 보면 백조사에서는 문예잡지를, 흑조사에서는 사상잡지를 각각 출판하게 돼있었다는데 광고와는 달리 흑조사는 이렇다할 활동도 못하고 얼마 후 간판마저 떼버렸다.
당시 『백조』는 우리들이 처음 보는 신식잡지였다.
더구나 잡지의 판형이 널찍한 4×6배 판이었고 책의 모서리도 반듯이 다듬어 놓지 않아 울퉁불퉁해서 책 페이지를 찾기가 힘들었다. 그것이 바로 프랑스식이라고 하는데 아주 멋있게 보였다.
표지에는 석영 안석주의 소녀그림이 석판으로 인쇄돼 있었고 권두에는 「백조는 흐르는데 별 하나 나 하나」라는 제목의 산문시가 실려있었다.
값은 80전으로 몹시 비쌌지만 한군은 이 『백조』를 사서 읽고있었다.
나는 이 잡지를 빌려다가 밤을 새워 다 읽고 돌려주었는데 홍노작(본명 홍사용)의 「나는 왕이로소이다」 라는 시가 가장 좋았다.
한군이 사온 이 잡지는 매우 인기가 있어서 너도나도 빌려다가 읽었다. 그러나 신기해서 읽기는 하였지만 보통학교 4학년 애들에게는 사실 수준 높은 잡지였다.
다만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들이 그때 이만큼 숙성했다는 것이다. 한군은 우리 반에서 가장 첨단을 걷는 멋쟁이였고 졸업후에는 기독교도들이 많이 들어가는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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