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서울대 합격 자랑 안 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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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우린 입시 위주 학교가 아니다. 대학에 가지 않고 사회에 진출하는 학생도 똑같이 배려해야 할 의무가 있다. 서울대 합격을 자랑하면 대안교육에 지장이 있다."

경남 산청군 신안면 외송리의 대안학교인 간디고등학교 박기원(52) 교장은 "간디고 재학생이 서울대에 합격했다는 것을 알리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

이 학교는 1997년 개교 이래 처음으로 올해 서울대 합격생을 배출했다. 3학년 김현정(19)양은 1일 서울대 법대에 농어촌특별전형으로 합격했다. 현정양은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486점(500점 만점)을 받아 고려대 법과대학에도 합격했다.

올해 서울대 합격자를 배출한 고교는 전국의 833개 교. 모두 서울대 합격을 홍보하려고 나서지만 간디고등학교는 정반대다. 이런 분위기는 '일류병과 허영에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당당하게 삶을 개척하는 사람이 돼라'는 설립자 양희규(49) 전 교장이 강조한 독특한 교육철학 때문이다. 따라서 이 학교는 재학생이 서울대에 합격했다고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대안학교에서 서울대 합격생이 나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교사들은 회의를 거쳐 언론매체의 취재에 응하지 않기로 했다. 현정양도 마찬가지다. 그는 공부방법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기사를 내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재학생들도 비슷한 반응이다. 학교 홈페이지에는 현정양의 서울대 합격에 관심을 갖는 외부의 시선에 부담을 느낀다는 글이 오르고 있다.

'서…서울대, 우리 학교에서는 말도 안 돼'(김가람), '우리 학교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강준희).

해마다 40여 명의 간디고등학교 졸업생 중 70% 정도는 대학에 진학한다. 나머지는 소신껏 비정부기구(NGO) 활동가.목수.농부.디자이너.음악가 등의 진로를 찾는다. 누가 어느 대학에 합격했는지는 공개하지 않는다.

양 전 교장은 개교 초기부터 '학교 철학'이라는 강좌를 통해 '남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신경 쓰지 말고 내 인생을 당당하게 꾸려 나가는 자유인이 돼라'고 강조해 왔다.

교육과정에는 이러한 학교의 전통이 그대로 배어 있다. 학생들은 일반 고등학교 과정인 지식 교과와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할 능력을 기르는 자립 교과(음식 만들기, 텃밭 가꾸기, 집짓기, 옷 만들기) 등을 배운다.

모든 교과는 학년.나이 구분 없이 능력에 따라 단계별로 진행된다. 진학하려는 학생들은 EBS 교육방송이나 인터넷을 통해 혼자 공부한다.

산청=김상진 기자

◆간디학교=양희규 전 교장이 미국 샌타바버라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귀국해 입시와 경쟁 위주의 제도권 교육에 반대하며 세운 국내 최초 대안학교. 논과 밭 3000여 평에 교사를 짓고, 비인가 학교로 출발했지만 현재는 고교 과정을 인가받았다. 교사와 학생들은 기숙사에서 공동체 생활을 한다. 경북 군위, 충북 제천 등에도 분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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