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양날의 칼' 국민연금 의결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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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야당과 재계 일부에서는 이 같은 유 장관의 발언을 놓고 연금사회주의에 대한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이들은 2004년 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를 허용했을 때도 연금사회주의의 길을 트는 위험한 발상이라며 반발했었다. 정부가 국민연금의 지분을 앞세워 민간 기업의 경영에 간여하게 되면, 그것이 자본주의 시장경제 원리를 해칠지 모른다는 걱정에서다. 사실 190조원에 달하는 자산 규모를 가진 국민연금기금이 민간 기업에 주식 의결권 행사를 하는 것은 양날을 가진 칼과 같다. 의결권을 투자한 회사의 주식 가치를 높이는 데 쓰면 좋지만, 자칫 잘못 사용하면 기업의 경쟁력을 훼손하고 기업가들의 의욕을 꺾어 국민경제에 악영향을 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에 대한 우려는 기우에 그칠 공산이 크다. 국민연금이 기업의 경영권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소지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말 현재 521개 상장기업에 투자하고 있으며, 한 개 사당 평균 보유 지분율은 2.63%에 달한다. 지분율 1~5%인 회사가 305개 사로 전체의 58.5%를 차지하지만, 지분율이 5% 이상인 기업도 69개 사로 13.2%에 이른다. 그러나 아직까지 경영권에 직접 영향을 주는 의결권 행사는 없었다.

국민연금기금은 지난해 총 487회의 주주총회에 참석해 1878건의 상정안에 대해 의결권을 행사했다. 주주총회 안건 중 1796건(95.6%)에 대해서는 찬성 의견을, 70건(3.7%)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을, 11건(0.6%)에 대해서는 중립 의견을 표시했고 1건은 기권했다. 중요한 것은 국민연금의 주식 의결권 행사가 정부의 지시를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민연금공단의 기금운용본부가 민간 전문가로 구성된 의결권 행사 제정위원회에서 제정한 지침에 따라 의결권을 행사한다. 이 지침에 의해서도 판단이 어려우면 민간 전문가로 구성된 의결권 행사 전문위원회의 조언을 받아 의결권을 행사하도록 돼 있다. 의결권 행사 전문위원회는 정부.사용자.근로자.지역가입자.시민단체.연구기관의 추천을 받은 9인의 민간 전문가로 구성된 비상설기구다.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지침을 수시로 검토하고, 필요한 경우 수정하며, 기금운용본부가 의뢰한 주요 주총 안건에 대한 의결권 행사 방향을 결정하는 기관이다.

그동안 의결권 행사 전문위원회의 운영 실태를 보면 앞으로도 정부가 기금의 의결권 행사에 직접 개입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된다. 특히 각계의 추천을 받아 참여하고 있는 위원들이 정부의 압력이나 입김에 굴복해 전문가적 식견이나 양식에 반해 의결권 행사 방향을 달리 결정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 생생한 사례는 국민연금이 캐스팅 보트를 쥐었던 KT&G 경영진과 칼 아이칸의 경영권 분쟁이다. 여기서 의결권 행사 전문위는 위원 각자의 판단에 따라 KT&G 경영진의 주장이 투자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칼 아이칸의 주장보다 장기적으로 주식 가치를 더 잘 키울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해 그들의 손을 들어줬다. 정부의 희망이나 요구에 따라 국가 주요 산업의 백기사 차원에서 KT&G 경영진을 편든 게 아니다.

현재 국민연금의 지배구조가 더 이상 개혁이 필요 없을 만큼 완벽한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보험료 부과 및 징수, 급여 지급 등 연금사업은 보건복지부 장관의 감독 아래 국민연금공단이 담당하더라도, 기금의 자산 운용은 독립된 국민연금투자공사와 같은 자산운용전문회사에 맡겨 자산 운용의 전문성과 책임감을 강화하도록 운용체제를 바꿀 필요가 있다.

박상수 경희대 교수.국제경영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