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비 없어 도망간 산모에게 온정 베푼 병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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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만원의 분만비가 없어 아기를 두고 도망간 산모에게 병원 측이 오히려 온정의 손길을 뻗어 감동을 주고 있다.

산모는 서울 성북구 보문동에 사는 이명심(33세)씨. 지난달 28일 산통으로 고대 안암병원 응급실을 통해 입원했다. 다행히 이씨는 당일 36주된 2.6kg의 다소 작지만 건강한 여아를 순산했다. 그러나 행복감도 잠시, 그녀에게 불안감이 엄습했다. 무일푼인 이씨에게 병원비가 걱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씨의 남편은 일용직 노동자로 현재 일거리가 없어 집에서 쉬고 있다. 그리고 이씨 부부에게 이번 출산은 다섯 번째. 이미 3남1녀를 두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현재 기초생활수급권도 상실한 상태였다. 가끔 얻는 일자리 때문에 기초생활자에서 제외된 것이다.

고민 끝에 이씨는 지난달 31일 아직 회복되지 않은 부석부석한 몸으로 병원을 빠져나갔다. 아기가 마음에 걸렸지만 신생아실에 있으니 오죽 잘 봐줄까 생각했다.

당황한 것은 병원 원무과 직원들. 퇴원수속을 밟아야 할 산모가 없어졌으니 미수금이 또 쌓일 판이었다.(병원에선 종종 이런 일이 발생한다) 그녀의 입원 기록을 찾아 연락을 취했지만 휴대폰은 이미 정지된 상태였다. 직원들은 환자 이름을 검색해 2002년 이씨가 4번째 아이를 출산한 기록을 찾아냈다. 그리고 당시 입원 보증인의 연락처를 확보했다. 그는 이씨가 공장에 다녔던 시절 동료였다.

그를 통해 몇 차례 설득 끝에 이씨가 병원에 나타난 것은 다음날인 2월 1일. 담당인 원무과 직원 이장록 씨가 보문동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지하 단칸방 바닥엔 온기가 없었다. 유리가 떨어져 나간 문짝에는 바람을 막기 위해 종이를 붙여놓았다. 다락에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뭉클했다." 이씨의 집을 살펴본 이장록씨 전언.

이런 얘기가 전달되자 원무과 직원 누군가가 십시일반으로 돈을 걷어 이씨를 돕자는 얘기를 꺼냈다. '얼마나 살기 어려웠으면 자식을 버리고 탈원을 했겠느냐', '요즘 아이 다섯 명을 낳았다면 애국자가 아니냐'라는 소리도 했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성금을 모아 분만비와 신생아실에 있는 아기의 퇴원을 돕기로 결정했다.

이씨에겐 신생아실에 있는 아기를 방문해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졌다.

당시 이 장면을 지켜본 신생아실 간호사는 "그녀의 얼굴 표정에선 죄책감이나 반갑다거나 하는 감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냥 매우 지쳐보이고, 슬픈 얼굴이었다"고 전했다.

주치의인 산부인과 송재윤 교수는 "아기에게 미열이 있긴 하지만, 산모와 아기 모두 건강한 편이다. 세상과 힘든 첫 대면을 치른 만큼, 아기가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랐으면 한다"며 산모와 아기를 격려했다.

이씨는 "뭐라 감사의 말씀을 전해야할지 모르겠다. 상황이 너무 막막하고, 숨이 막힐 것 같아 안 될 일을 하고 말았다. 앞으로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마다 여러분의 도움을 생각하며 열심히 아이들을 키우겠다"고 말했다.

고종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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