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76)|<제86화> 경성야화 (11)|보통학교|조용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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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나무를 살 사림이 먼저 가격을 얘기하면 중도위가 그 조건에 맞는 나무장수에게 접근해서 값을 묻고 흥정한다.
비싼 것은 장작, 그 다음이 솔 나무, 제일 싼 것은 잡목 잎사귀를 큰 단으로 묶은 것이었다.
이렇게 값을 흥정하는 모습이 재미있어 구경꾼들이 모여드는데 얼마 뒤에 낙찰되면 나무강수는 나무를 주인집까지 운반해 준다.
나무 값을 받은 다음 다시 돌아와 중도위에게 환전을 주고 옆에 있는 술집에 들어가 막걸리를 몇 사발 들이킨 다음 집으로 돌아간다.
나무장은 섣달 그믐께가 되면 흥정이 많아져 아침부터 구루마와 소바리가 끊일 새 없이 들락날락하였다. 소잔등에는 솔 나무 큰 단을 양독에 두단씩 모두 넉단을 싣는게 보통인데, 한단에 50전씩 모두 2원에 파는게 보통이었다.
구멍가게에서는 솔 나무를 작은 단으로 만들어 동나무로 팔기도 하고 장작도 4개비, 5개비를 작게 묶어 날기도 했는데 이런 동나무는 5전씩이었다.
당시 서민들은 대개 이 동나무를 사다가 밥도 짓고 온돌방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나는 이 돈의동 집에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책을 끼고 널다리 끝에 있는 할아버지한테 한문을 배우러 다녔다.
나는 열살 때 교동 보통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할아버지한테 한문을 배워 논어·맹자까지 끝냈던 기억이 난다.
아침을 먹고 큰댁 (할아버지 댁)에 가 글을 배우고 오후 1시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은 다음 다시 큰댁에 가 글을 읽고 다섯시쯤 돌아오곤 했다. 큰댁과 한양골 우리 집과의 거리는 걸어서 6∼7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여섯 살 때부터 한문을 배웠다고 치더라도 4년 동안 배운 셈이니 결코 짧은 기간은 아니었다. 그때 이런 식으로 한문을 배웠던 것이 지금까지도 큰 도움이 되었다.
아홉살짜리가 논어· 맹자를 배웠으니 무슨 뜻인지 알 턱이 없고, 효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암송할 정도였으나 그것 역시 제 뜻을 알리 없었다.
이렇게 한문을 배워서 열살 되던 1918년 봄 교동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일본이 우리 나라를 식민지로 만든 다음 자기들 욕심 같아서는 교육을 시키지 않고 몽매하게 만들어 짐승처럼 부려만 먹고 싶었지만, 그러나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마지못해 교육을 시키는데 중학교까지만 가르쳐 면서기나 군서기로 부려먹을 작정이었다.
소학교를 「보통학교」, 중학교를 「고등보통학교」라고 불러서, 일본과는 다른 이름을 붙여 놓았다.
수업은 우선적으로 일본말 가르치는데 주력해 일본어 시간이 퍽 많았다. 일본말은 물론 국어라고 불렀다.
보통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어린 마음에 몹시 이상하게 느껴진 것은 일본말을 「우리 나라 말」, 일본을 「우리 나라」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와카쿠니」 (아국)라고 하면 우리 나라인 조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본을 가리켰고 「고쿠고」 (국어)는 우리 조선말이 아닌 일본말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집에 돌아와 아버지께 물어보니 아버지는 나라가 망했으니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어머니는 일본 놈이 우리 나라를 뺏어가서 자기 것으로 만들었으니 우리 나라는 없어진 것이고 왜놈들이 마음대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나라가 없어져 모두 일본 놈이 되었고, 아니 일본 놈의 종(복)이 되었고, 나라 말도 잃어버려 일본말이 국어가 된 것이라고 하면서 이제 네가 크면 모든 것을 알게될 것이라고 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일러주었다.
1학년 담임 선생은 김연영이라는 한국 사람이었다.
이 선생이 아무 거리낌없이 일본말을 「고쿠고」, 일본을 「와카쿠니」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어린 마음에도 퍽 이상하고 어색하게 들렸다.
집에서는 우리 나라는 조선이고, 우리 나라 말은 조선말로 알고 늘 그렇게 써 왔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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