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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국후특파원이 소서 만난 전 북한관리 박길용씨 회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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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조만식 선생 총살 공공연한 비밀”/“놀라운 용기로 신탁통치 반대/처형소식 듣고 고려호텔서의 「첫 인상」떠올라”
『남조선에서는 아직도 조만식 선생의 최후에 대해 모르고 있습니까.』
북한에서 외무성부상등을 지내다 59년 모스크바로 망명한 박길용 박사(71·소 과학아카데미동방학연구소 선임연구위원)는 지난 6월16일 자신의 자택을 찾아간 기자로부터 조만식 선생의 생사에 관한 질문을 받고 약간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박박사는 『북한에서는 고당이 6·25전쟁중 평양에서 총살당했다는 사실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면서 『북한에서 탈출,망명한 재소고려인 누구에게 물어봐도 쉽게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순간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우리현대사에는 얼마나 많은 공백이 있는가.
노령인데다 불편한 몸으로 기자와 함께 박헌영의 딸을 찾기 위해 1주일동안 모스크바 변두리를 헤맸던 그는 고당과의 만남,그리고 그의 최후에 대해 담담하게 술회했다.
다음은 박박사의 회고.
나와 고당은 처음부터 「남다른 인연」이 있었습니다.
소련의 한인 2세인 나는 대학(노어학과)졸업후 교원생활을 하다 조선이 해방되면서 갑자기 소련군 대위계급장을 달고 45년 9월 입북,바로 평양의 고려호텔에 임시숙소를 정했습니다.
나의방 맞은 편에 그분이 묵고 계시더군요.
고당은 날마다 이른 아침 비서등과 함께 호텔주변을 산책했습니다.
먼저 평양에 들어온 동료가 『저분이 바로 북한의 인민들로부터 「조선의 간디」로 추앙받고 있는 조만식이다』고 귀띔해 줬습니다.
호텔복도와 산책길 등에서 그분과 눈이 마주칠때면 서로 눈인사를 했습니다.
입북 한달후부터 소 25군 정치사령부에 근무하면서 소군정지도자들이 고당을 만날때마다 통역을 맡았기 때문에 그분을 늘 접촉하게 됐지요.
45년 11월까지는 그런대로 소군정과 고당사이는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는 줄다리기를 하면서도 외형적으로나마 크게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해 12월말 「후견제」(신탁통치)문제가 나오면서부터 그분은 놀랄만한 용기와 끈기로 끝까지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46년 1월5일부터 그가 묵고 있는 고려호텔부근에는 10여명의 경비병이 배치되면서 「오랜 연금」에 들어 갔지요.
그후 나는 친구 기석복(로동신문주필·문화성부상·소 망명사망)과 함께 김책(부수상겸산업상·전선사령관·51년사망)의 집 부근으로 집을 얻어 정착했습니다.
46년 8월까지 소군정에서 일하다 같은해 9월1일 평양교원대학이 설립되면서 부학장에 부임,48년 6월까지 교원양성에 몰두하다 북조선공화국이 창립되면서 조소문화협회(위원장 이기영·작가·사망) 부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부학장시절은 물론 조소문화협회 부위원장때도 소군정과 공산당 고위간부들이 방북하거나 김일성 수상이 소련을 방문할때마다 통역을 전담했고 노동당의 중요한 정책등에대한 번역을 맡았었습니다.
때문에 4백여명의 「소련파」총수이자 당시 노동당 제1비서였던 허가이등 당정고위간부를 맡고 있던 소련파인사들과 긴밀한 관계였으며 특히 허와는 친형제와 같은 인간적인 사이였습니다.
전쟁전까지 고당이 평양의 변방 「특별가옥」에서 연금되어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50년10월초순 허로부터 고당을 비롯,민족계열인사등 5백여명에대한 북한정권의 최후결정을 들은 순간 5년전 고려호텔시설의 그분 모습이 스쳐갔습니다.
성격이 원만하고 인간적이었던 허의 얼굴도 평소와는 크게 달랐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최용건 민족보위상을 비롯,당정치위원들의 얼굴에는 패전의 참담한 분위기속에 살기가 흘렀습니다.
나는 지금도 당시 그곳의 「살기넘친 분위기」를 잊을 수 없습니다.
허가이·박헌영 등 수백명의 국내파,연안파,소련파 지도급 인사들이 차례로 숙청이 끝난 59년.
나는 평양에 남은 몇명의 소련파중 한사람이었습니다. 2년여동안 동독·체코등 2개국의 초대 대사를 거쳐 외무성 부상까지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도 언젠가 「숙청」이라는 칼날이 올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항상 뇌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김일성 수상에게 『소련에 가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신상발언을 했습니다.
김수상은 『이론가 길룡이가 공부를 더할 필요가 있느냐』며 핀잔을 던지다 집요한 나의 설득끝에 공부하고 다시 돌아오는 조건을 붙여 승낙했습니다.
모스크바에 돌아온 나는 소과학아카데미 동방학연구소에서 만학에 몰두,「북조선공산당 창건」이라는 논문으로 정치학박사학위를 받은뒤 지금까지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기석복과 보트카를 놓고 북한시절을 회고할때마다 50년 10월 그때 허가이 사무실의 삭막한 분위기가 늘 되살아나 이데올로기의 갈등속에 매몰돼버린 우리민족의 아픔같은 것이 느껴지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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