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단편 릴레이 편지] 나무의 미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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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나무에도 미라가 있을까요? 오래된, 상한, 척박한 나무들을 볼 때마다 간혹 들곤 하는 생각입니다.

대부분의 노거수(老巨樹)는 속이 비어 있다지요. 나무껍질에 새겨진 나이테조차 희미해져 셀 수가 없다지요. 그러다 어느 하루 다 삭은 나무의 밑둥치마저 무너져내리면 나무가 있던 기슭의 한 십리는 텅 비겠지요? 텅빈 고요가 오후의 햇살과 더불어, 걸릴 곳 몰라 허공을 떠돌겠지요? 길밖에 남지 않거나, 길 하나가 새로 나겠지요?

돌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휘어져라 허리를 내준 비탈에 선 나무, 상할 대로 상한 이름모를 쓸쓸한 나무들을 볼 때마다 그 나무에 둥지를 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소리의 묘혈, 빛의 묘혈, 바람이 들락이며 살을 말리고 있는 그런 나무껍질 속에 유폐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잎들을 다 떨군 저 나무숲들은, 얼마나 많은 바람과 햇빛과 눈비와 꽃들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을까요? 저 나무들은 시간과 망각을 어떻게 견뎌내고 있는 걸까요? 오래 전 둥지를 틀었을 새들처럼 가만가만 몸을 기대봅니다. 결코 미라가 될 수 없는 오래된 나무에로요.

글.사진=정끝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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