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싸움질하는 간판은 싫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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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살고 있는 그 시대를 과도기라고 생각한다는. 더는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문화적 절정의 르네상스를 살았던 이탈리아 사람들도 그랬을 것이다. 급하게 변화하는 지금 이 시절이 지나면 언젠가 모든 것이 평온을 찾게 되는 때가 오게 될 거라고. 괴로운 삶 속에서 언제나 행복을 그리워하는 듯 말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만큼 과도기라는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민족이 또 있을까? 사실 청계천이야말로 과도기의 가장 극명한 상징이다. 나는 서울 거리를 다닐 때, 할 수만 있다면 돌아가더라도 청계천 쪽으로 가지 않았다. 청계천 고가를 없앤다는 서울시의 발표를 들었을 때, 내 속에선 몇 가지 감정이 고개를 들었다. 청계천을 통해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근심,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역사성에 대한 정의, 청계천 고가가 주는 우울함으로 머리가 복잡했었다. 서울시가 약속한 것처럼 새로 정비된 청계천에 물고기가 뛰놀고 아니고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다만 청계천 복원이 어떤 '순리'를 따르는 길이라는 생각이 막연히 들었다.

요즘 청계천을 지날 때는 하늘이 보인다. 머리 위를 두껍게 가리고 있던 콘크리트 사이로 인색하게 보이던 하늘이 통째로 보이는 것이었다. 청계천의 하늘엔 다른 거리에서 볼 수 있는 하늘과는 또 다른, 강렬하게 환기시키는 무엇이 있었다. 그러면 나는 내 마음속에서 터져나오는 탄성을 억제하지 못하고 큰 숨을 쉬어 보는 것이다. 그건 삼각지나 원남동을 지날 때도 다르지 않았다. 뭐랄까, 두꺼운 외투를 벗고 봄볕을 쪼일 때 같은 독특한 활력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바뀐 시대가 우리 세대에 주는 일종의 선물이었다.

걱정했던 것이 좋아지니 욕심이 하나 더 생겼다. 간판 말이다. 나는 서울의 풍경을 망가뜨리는 것은 아무 건축적 고안 없이 오직 기능적이기만 한 건물들과 조형적으로도 별로인 건물에 딱풀처럼 붙어 건물 자체를 집어삼키고 있는 간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1백년 전만 해도 그토록 아름답던 도읍지가 몇 세대를 거치면서 이렇게 천덕스러워질 수 있는 건지 믿을 수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태생부터 지니고 있는 미학적 감각들이 어떻게 이렇게 송두리째 사라져버릴 수 있을까, 놀라울 따름이다.

서울 시내 어디건 상가를 지날 때마다 나는 성황당에 온 듯 정신없이 울긋불긋한 간판 앞에서 한순간 아찔해진다. 과연 그렇게 크게, 그렇게 조악하게, 그렇게 주변환경과 상관 없이 싸움 걸듯 간판을 내걸어야만 옳은 걸까? 도시의 아름다움을 가늠하는 척도 가운데 간판만큼 중요한 게 또 무엇일까? 그런 상황은 서울에서 가장 부자동네라는 압구정동도 예외가 아니다. 언젠가 한 건축가는 자기가 설계한 건물을 더는 자랑스럽게 바라볼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그 건물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뒤덮은 간판은, 설계를 통해 드러내고 싶었던 건축가의 생각들을 완전무결하게 훼손하고 있었다고.

1980년 홍콩에 처음 갔을 때 간판 천국인 거리를 보고 실망이 컸었다. 그러나 20년이 지나 홍콩에 갔을 땐 난 홍콩 시장을 찾아 차라도 한잔 사주고 싶었다. 그 복마전 같던 간판들을 어쩌면 그렇게 멋지고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을까?

고층 건물을 마구 짓고, 국가적 잔치를 여는 것만이 한국의 성장을 과시하는 방법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만의 단순한 생각일지 모른다. 스위스가 과연 엑스포나 올림픽을 통해 그토록 단단하고 자존심 강한 나라로 도약했을까? 청계천을 통해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맞이했다면 이젠 말끔하게 정비한 간판을 통해 아름다운 서울이라는 자존심을 되찾아야 한다. 그것은 어떤 정치적 당쟁이나 명분보다 급하고 또 중요한 일이다.

박정자 연극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