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책갈피] 짤막한 글, 진한 로맨스 …'돌연변이 무협'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9면

진산 무협 단편집
진산 지음, 파란미디어
392쪽, 9000원

무협소설계의 '마님'으로 불리는 작가 진산이 12년간 쓴 단편 무협 모음집이다. 무협 단편으론 국내 최초다. 그런데 무협에 웬 단편? 7~10권씩 아랫목에 쌓아놓고 뿌듯함을 느끼며 읽게 마련인 대표적 장편이 무협 아니었던가.

그렇다. 이 책엔 장편 무협의 단골메뉴인 호쾌함이나 신(神).기(奇).요(妖).환(幻) 은 없다. 대신 가끔 눈시울을 적시게 하는 여린 감성과 독자의 호흡을 잡아놓는 간결하고 긴박한 문장은 차고 넘친다. 굳이 정의하자면 '무협의 탈을 쓴 로맨스'라고 할까.

단편집은 작가 스스로 '일곱 명의 돌연변이'라고 부르는 7개의 단편으로 구성됐다. 첫 편 '광검유정(狂劍有情)'은 검에 미친 사내 광검 서귀의 이야기다. 둘째 편 '청산녹수'는 신라 화랑도를 위해 처자식을 사지로 내몬 황선장군 얘기. 1995년 하이텔 동호회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받았고, 작가 진산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린 작품이다.

'고기만두' '웃는 매화' '날아가는 칼' '잠자는 꽃'은 매란국죽 사군자로 불리는 강호 고수들의 얽히고 설킨 인연과 삶을 수채화처럼 그려냈다. 연작(連作)이지만, 97년 발표한 '고기만두'와 2006년 작 '잠자는 꽃' 사이엔 10년 세월이 떨어져 있다. 그런데도 네 편은 한날 한시에 태어난 것처럼 탄탄한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스토리보다는 개성 강한 등장 인물들이 주는 강렬한 이미지 덕분이다.

'마님빠'들 사이에선 부제 '더 이상 칼은 날지 않는다'를 작가의 무협 은퇴선언으로 해석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눈 내리는 휴일, 달리 하루를 즐겁게 보낼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꼭 일독을 권하고 싶다.

이정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