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공론화된 교육과정 개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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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제 10년의 세월이 흘렀고 우리 사회가 상당히 발전했으므로 이번에는 그런 전철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이번에 발표된 개정안을 보면 역시 교육과정은 힘센 자들에 의해 결정되지, 교과교육 전문가 집단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됐다.

이번 교육과정 개정은 수시 부분 개정이라고 누차 강조해 왔다. 하지만 발표한 내용을 보면 전면 개정이다. 대폭 개정을 하고자 했다면 먼저 총론을 확정하고 각론 교육과정을 개정했어야 한다. 각 과목에 몇 시간이 배정될지, 어떤 학년에 몇 시간이 배정될지, 어떤 과목들이 어떻게 통합될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내용 부분을 논의한단 말인가? 지난 2년 동안 논의한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번에 시수 조정을 보면 힘의 논리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전임 교육부총리는 역사교육 강화를 위해 과목을 분리하고 시수를 늘리겠다고 이미 오래전에 발표했다. 이런 식으로 먼저 발표해 버리면 논의는 실종된다. 해당 영역은 가만히 있어도 유리하게 개정되는데 누가 협상에 응하겠는가?

또 과학기술부총리와 교육부총리가 과학.기술교육을 강화하기로 협정을 맺기로 하면서 10학년 과학을 주당 세 시간에서 네 시간으로 늘리고, 수학.과학.기술.가정의 선택과목 군을 수학, 과학.기술, 가정으로 분리했다. 이에 관한 전문가들의 공론의 장이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그럼 앞으로 경제부총리가 요구하면 경제가 독립 교과로 분리 신설될 수도 있다는 말인가?

교육과정은 시대.사회적 산물로 그 당시의 상황을 적절하게 반영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학문.교육적 측면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역사 과목을 분리하고 시수를 한 시간 더 늘리면 독도나 동북공정 문제가 해결되는가?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 주는 데는 현재의 시수로도 충분하다. 그동안 문제가 됐던 것은 역사 전공자가 아닌 비전공자들이 역사를 가르쳐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과의 경우 역사와 지리, 일반사회를 삼분해 15시간을 다섯 시간씩 나눠 가르치고, 그 시수에 맞게 교사를 선발하면 된다. 그리고 학년별로 시간을 집중 배분해 한 교사가 한 과목을 가르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고등학교 과학은 통합돼 있다고는 하나 물리.화학.생물.지구과학 4개 영역이 4분의 1씩 고르게 포함돼 있고, 선택과목 역시 영역별로 두 과목씩만 개설돼 있다. 이번에 한 시간을 늘려 주당 네 시간이 되면 편제를 고치지 않고도 각 전공 교사가 해당 영역을 가르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학생들은 여러 과목을 수강해야 하기 때문에 학습 부담이 늘어난다는 문제점이 있다.

선택 과목의 과목군도 함부로 조정해서는 안 된다. 군별로 최소 한 과목 이상 이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목군을 늘리면 학생들이 의무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과목이 늘기 때문에 학생들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신장시킬 수 있도록 선택하는 데 제한받을 수밖에 없다.

교육과정은 나라의 미래를 결정할 국가적인 중대 사안이다. 교육과정이 잘못 개정되면 '우리 아이들이 더 잘 교육받아서 더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학부모들의 염원도 물거품이 되고 만다. 학부모들이 교육과정 개정 과정을 두 눈 부릅뜨고 감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송호열 서원대 교수·지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