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와 포도주(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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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술꾼들에게만 통용되는 이런 유머가 있다. 제목은 「진본 노아의 방주」.
노아는 방주에서 내리자마자 포도원을 만들었다. 거기에 사탄이 나타났다.
『노아야,무슨 나무를 심고 있니.』『포도 나무야.』『그건 어떤 나문데.』『열매가 아주 달아. 즙을 내 마시면 기분이 아주 좋아진다구.』『그럼 나도 함께 심어줄까.』『맘대로 해.』
사탄은 포도나무를 심고 나서 먼저 새끼양을 잡아 그 피를 포도나무에 뿌렸다. 그 다음엔 사자와 원숭이,마지막엔 돼지를 잡아 피를 뿌렸다.
그러고 나서부터 사람들이 포도주 한잔을 마시면 새끼양처럼 양순해 지고,두잔을 마시면 사자처럼 자기 힘을 과시하고,석잔을 마시면 원숭이처럼 날뛰고,넉잔을 마시면 돼지처럼 진창을 헤매게 되었다고 한다.
술이란 적당히 마시면 대화의 윤활유 구실을 하고 또 건강에도 좋다. 그러나 도를 지나치면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주는 것은 물론 자신의 건강도 크게 해친다.
그런뜻에서 최근 한 전문직 여성단체가 마련한 「술교제문화,어떻게 개선할 것인가」라는 주제의 세미나는 여성기업인들이 술자리에서 겪어야 하는 곤혹스러움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새삼 우리의 음주문화를 돌이켜보게 하고 있다.
이 세미나에서 지적된 한국형 술교제문화의 특징은 대충 이렇다. ▲협상이 타결된후에 술자리가 마련되는 외국에 비해,협상을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고 가기 위한 사전 책략으로 이용된다. 따라서 ▲중요한 협의는 반드시 술자리에서 이뤄진다 ▲분위기 보다는 술의 양과 마시는 시간이 더 중요시된다 ▲2차,3차로 자리를 옮겨가며 계속 마신다 ▲술주정에 대해 대체로 관용적이다.
그 결과 기업의 과도한 술교제가 접대비 명목의 비자금 조성등 탈세를 부채질하게 되는가 하면,술을 마시지 않고도 가능한 건전한 상거래가 정착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흥청망청 쓰는 「남의돈」이 결국 소비문화를 조장하고 퇴폐적인 향락산업만 번창시켜 전체 사회의 물을 흐려놓는다는 지적이다.
지난 85년인가 세계보건기구(WHO)는 한국사람들이 세계에서 술을 제일 많이 마시는 국민이라고 했다. 독서량은 바닥을 헤매고 있는 터에 음주량 1위는 우리국민의 정서의 질을 말해주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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