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의 버들피리(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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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서울 을지로3가 지하철역 구내에서 이따금 한 할머니가 버들피리를 팔고있다. 2호선과 3호선의 승강장을 연결하는 복도에 허름한 옷을 입고 무너질듯 쪼그리고 앉은 이 노인은 한뼘 길이쯤 되는 버들피리를 플래스틱 바가지에 가지런히 담아놓고 오가는 사람의 발치만 바라보고 있다.
노인은 가끔 손수 만든 버들피리를 입에 대고 『아리랑』가락을 짧게 불어보이기도 한다. 비록 서툰 솜씨긴 하나 적어도 농촌출신들에게는 떠나온 고향을 불현듯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미 예전부터 도회 한복판에서 사라져버린 고향과 자연의 상징이기도 하다.
지하철역 구내에서는 스피커를 통해 여러가지 소리가 들린다. 안내방송은 물론이고 새소리,시냇물소리,풀벌레소리,파도소리,다듬이질소리 따위다. 테이프에 저장된 「가짜」소리다.
이 노인이 부는 버들피리소리와 스피커소리가 한데 어우러지면 그 자연의 화성이 그럴듯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 전문가가 기술적으로 잘 채록하고,전자장치에 의해 증폭·확대돼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소리는 초라한 버들피리소리를 압도해버린다.
뿐만아니라 사면팔방이 시멘트와 타일로 폐쇄된 사막한 지하공간과 승객들의 소음,혼탁한공기,지축을 흔들 것같은 전동차바퀴소리 속에서의 버들피리소리는 금방 질식하고 압살당하는 형국에 처한다. 기계문명이 자연을 정복해가듯 인공적인 전자음이 자연의 소리를 제압해 버리는 것이다.
광역의회선거를 앞두고 전국에서 2천8백여명의 후보가 바야흐로 득표활동에 돌입했다. 그들이 제각기 쏟아내는 거창하고 화려한 공약이 난무하고있다. 현금봉투와 별의별 선심·환대가 유권자들을 유혹하고,판단을 교란시키고 있다. 거짓없는 목소리,성실한 후보는 이들에게 가리고 압도되기 쉽다. 공약이 거창하고 선심과 환대가 달콤할수록 더 돋보인다. 녹음된 가짜소리가 기계에 의해 얼마든지 미화되고 증폭될 수 있듯이 사람의 가면 또한 얼마든지 분장과 가식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노인이 부는 버들피리는 비록 서툴고 초라하긴 하나 성실한 후보의 목소리처럼 꾸밈없고 거짓없는 우리 마음속의 소리이기에 소중한 것이다. 우리의 선택이 올바르려면 후보자가 보이는 말솜씨와 선심이 아니라 그 인간의 진실됨과 능력을 판별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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